근기가 달라 이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자신을 주장하는 마음에서 점차 자유로워진다.
지금이 각자의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마음에서 점차 자유로워진다.
아침에 글 하나를 읽었다. 출가, 재가를 떠나 공부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서로 공감하기가 어렵다고 적고 있었다. 근기가 낮은 이는 높은 이의 말을 이해못해 공감이 어렵고 근기가 높은 이는 낮은 이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공감이 어려우니 말하고 쓰는 경계 모두가 다 내 마음이 짓는 것이라 생각하면 속편하고 다툴 일이 없지 않을까, 그것이 아상 거두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이 글이 마음에 걸리니 내 경계가 아직은 이 부분에 편안하지 않나 보다 싶어졌다. 어느덧 글에 나를 대입하고 있는데 결국에는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근기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니 무엇으로 나아감이 좋은 일인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질문한다면 답이 무엇일까. 나의 입장은 무엇일까.
근기가 낮은 이는 높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공부가 지어지면 그의 말이 바른 말임을 알게 된다. 낮은 이가 만난 높은 이는 읽었지만 이해못한 경전과 같으니 다르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마음을 거두면 그와의 대화과정을 통해 자신이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을 마음 한켠에 담아두는 것도 괜찮다. 한번 사유해보리라는 그 마음이 우리 공부를 성취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근기가 높은 이는 낮은 이의 이해를 알아차린다. 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마음과 이해가 어디에 머무는지, 때로는 그렇게 머물게 된 인연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자신의 이해를 받아들이지 말지가 온전히 상대에게 달렸음을 알면서도 이런 길도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근기에서 닿아있는 부분을 제시한다. 사람이 달라 머무는 마음, 내세우는 방식이 다르니, 어떤 이는 내가 맞고 당신이 틀렸다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이해를 은근히 제시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마음이 짓는 경계라고 생각하는 것, 좋은 방법이다. 그저 인연따라 각자 배워가리라 놓아버리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엇을 지어야 우리 불성이 만족하는가 묻는다면 그 답으로 충분할까. 마음으로 무엇을 짓겠는가. 부처님이 알려주시고자 했던 가르침으로 나아가는 길에 선연되는 것을 짓겠다. 한편으로는 편함에 안주하면서 한편으로는 함께 나아가는 수고로움에 안주하겠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아는 것은 온전하지 않으며 변화해가고 있다. 그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여도 어리석은 다툼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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