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내가 어떠한가'의 시각을 던져두고 이야기하자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씀이 어떠한지를 알기에 탁한 공기의 매캐함을 싫어하듯 멀리하고 싶어집니다. 시기, 질투는 아닌데 그가 잘되는 듯 보이는 것이 탐탁지 않습니다. 그럴만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시점에서 묻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요즘 다시 사찰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다시 번잡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번뇌 중 싫은 사람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밥을 먹든, 모여서 뭐를 하든 자꾸, 굳이 내 가까이에 그 사람이 위치하게 되는 것을 보면 웃깁니다. 상황이 저를 놀리는 것도 같습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그렇죠. 내가 불편하니 상대도 그걸 느낄 터인데 굳이...
살아가면서 각자 넘어가야 하는 관문이 있을 것인데, 요즘 제 상황이 그중 하나겠구나 싶습니다. 자꾸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떠올리게끔 상황이 만들어지니 말입니다. 싫어할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싫다는 마음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니 무심해지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해 보입니다.
얼마나 오만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내 마음이 소승의 마음에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한 것을 싫어하고 청정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 부분은 철저하게 내가 탁한가 청정한가의 문제를 떠나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오탁악세가 싫어서 극락정토를 흠모한 아사세의 어머니가 생각나는 지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이런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청정함을 좋아한다고 한들 지금 상태에서는 그 어떤 만족감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 안주할 길과 멀기 때문이겠지요. 나 홀로의 청정은 소승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청정을 바라듯이 상대도 청정할 것을 염원하고 내가 탁함의 고통을 싫어하듯 상대도 탁함을 벗어나라 하는 대승에 이르러야 마음은 만족하여 쉴 수 있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따라가는 가여운 존재로 우리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서 소승은 틀렸고 대승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승으로서는 내 안의 불성을 따르기에 한계가 있겠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하고자 적어보았습니다. 다르지 않아서 고통받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나의 불성은 자비로 바라봅니다. 그 속에서는 싫어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주장하기 참 어려워집니다.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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