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신해, 믿음과 이해, 무엇이 먼저인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18. 10:56

법화경 신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신앙이라 하든 종교라 하든 일반적인 믿음과 이해에 대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번 법화경 신해품을 빌어 믿음과 이해에 대해 적은 바가 있다. 법화경 번역과 해설을 주로 하는 어떤 이의 글을 보고 나서였다. 그의 글은 이해가 되어야 믿을 수 있다, 부처님도 이해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할 바가 있다고 본다.


이해가 바탕되지 않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믿으라고 하고 믿습니다에 머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맹신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야기를 잘 생각해보라. 일단 법화경은 방편이 아닌 진실을 밝히는 경이다. 진실을 밝히면 될 것을 왜 부처님은 방편을 빌어 법을 설하셨을까? 중생의 근기가 상이하여 누군가는 진실로 밝히는 법을 받아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이는 도리어 이 법을 폄훼함으로써 오히려 악업에 빠질 수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진실을 밝힐 때 부처님은 논쟁하지 말고 내 진실한 말을 믿으라고 하셨다. 해설자의 말처럼, 중생의 근기가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지만, 그 진실의 법을 펼칠 때에는 또한 믿으라고 하신다. 법화경이 요구하는 바, 법을 들은 우리가 할 일은 일단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해도 못하는데 믿으라고? 아주 비합리적인 일이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그렇지도 않다. 잘 생각해보라. 경에 말씀하시길 부처님이 밝히는 진실은 우리의 사량과 분별을 넘어선다고 하셨다. 불퇴전의 보살들도 불지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불지혜는 여래에게 배워야 한다고도 하셨다. 그 뿐인가. 우리가 법화경의 법문에 들어서는 것은 우리 지혜로 인함이 아니라 했으니 이해를 앞세운다면 부처님의 비밀한 참뜻에 닿는 것은 요원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믿는 마음으로 경을 마주하고 바르게 알고자 마음을 내라. 내가 생각하기에 그 순간 여래의 가르침이 시작되며, 그 가르침 속에서 자신의 근기에 합당한 이해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게 된다.


이해하면 믿겠다는 생각이 법화경에는 맞지 않다고 본다. 상불경품에서 부처님은 증상만을 밝히면서 자신의 경험, 자신의 육식만을 믿는 이를 언급하신다. 내가 이해한 것으로만 법을 바라보면 증상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와 멀지 않다. 내가 미처 닿지 못하는 법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을까? 지금 나의 이해를 벗어난다고 멀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라. 그렇게 해야 함을 설명하고 계신데 이제와서 이해를 앞세운다면 글쎄다. 이해없는 믿음은 맹목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해에 앞선 믿음을 법화경에서는 요구하고 있으며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행은 넓고 깊은 이해에 닿게 한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법화경은 철저하게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여 들어가야 하는 가르침이다.


믿는다는 것, 확신의 의미는 무겁다. 우리는 모두 불성을 담고 있다. 모두 불자라는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 불자라는 이름이 실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차이를 불러오는 큰 변수로 알아차림, 믿음, 확신을 거론하고 싶다. 생각해보라. 신해품의 궁자는 장자의 아들이었다. 그가 쓰레기를 치울 때에도 아들이있고 장자의 유산을 상속받을 때에도 아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궁자가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었는가이지 않은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야 그 모든 것이 실상이 된다. 불법을 받아지니는 마음 또한 다르지 않다. 그 불법이 나에게 진실이라는 확신은 나의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니 물어보자. 이해된만큼 믿을 것인가. 믿음으로 들어가 진실을 이해할 것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충분히 표현되지는 않았다. 여러가지가 얽혀있어 하나로 간단하게 적을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어찌되었든 법화경을 읽고 있는 나의 생각이 지금은 이러하다. 그리고 믿음으로 시작한 법화신행은 누구보다 더 넓고 깊은 법으로 나를 이끈다고 믿고 있다. 근기를 키운 후에 마주하는 가르침이지만, 믿고 배워가는 가운데 근기가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해는 나를 주로 하지만, 믿음은 법을 주로 한다. 우리는 무엇을 주로 하여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까. 아무튼 신해를 이해해서 믿는다로 보는 것보다 믿음으로 들어가 이해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에는 더 적절하지 않은가 싶은데, 내 생각이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이해와 믿음을 너무 구별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리 저리 사유한 바를 가지고 글을 쓰기는 하지만, 생각하니 이런 분별도 그리 마땅치는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