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왕생에는 품위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3. 30. 13:46

오늘 카페에서 왕생에는 품위가 있는가의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 눈이 갔다. 내가 관심있게 생각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토삼부경을 많이 읽지 않았기에 섣불리 말을 하기 어렵다. 또 염불하여 극락왕생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으며 나도 그런 믿음을 갖기에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으니 다른 의견을 글로 적는 것이 무슨 유익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나처럼 무식하면 오히려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산이 파랗다고 누군가가 말했다면 산이 파랗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미타부처님의 18원은 그 이름을 불러 그 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단지 그 국토에 태어나는 것을 말함이지, 48대원의 말씀을 넘어서서 다 동일하다고 말하면 확대해석이 될 수 있다. 9가지 왕생의 모습도 결국 그 나라에 태어나는 모습으로 부처님의 원과 합치된다. 특히 하품을 읽어보라. 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왕생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일 이름불러 극락가는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러 극락가는 이 하품의 모습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경에 나온 모습은 다르다.


물론 그렇게 전법해서 누구나 염불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극락왕생하자고 말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로써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을 해설함에 있어서 가르치는 이는 경전을 넘어서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극락왕생을 약속하셨다. 그 대원에 의지해서 우리는 그 이름을 귀히 여기고 부르며 찬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염불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불자의 제행 무게를 가볍게 여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글 적은 이가 사견을 적듯 나의 사견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부처님의 뜻을 생각해보라. 자비로 세상에 나와 너희들도 부처되라 말씀하시는 그 뜻을 생각해보라. 그냥 염불만 하는 것과 제행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을 행하며 염불하는 것, 어떤 것이 부처님의 뜻에 가깝겠는가. 염불만을 하는 것보다 제행을 겸하여 염불함이 더 수승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더 세상에 유익함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고 본다.


법화경 이야기를 덧붙이면 이렇다. 법의 본성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있다고 법화경에 나온다. 또 경의 가르침만 받아지녀도 훌륭한데 거기에 육바라밀을 더한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했다. 모든 부처님의 뜻은 같으며 따라서 가르침을 통해 흐르는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아미타불 염불만 지극히 해도 훌륭한데 불자로서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무엇을 부처님이 참으로 기뻐할까 잘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불성은 평등하여 사랑하고 미워함이 없다. 단지 사랑하는 성품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해보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 자신을 따르며 그 뜻을 이어받아 자신처럼 살아가는 이 중 누구를 기뻐할까. 염불만 하는 이, 염불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그대로 삶 속에 펼쳐가는 이, 다시 말해 제행을 갖춘 이, 어떤 불자가 되어 아버지를 따르고 싶은가.


극락왕생은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하기에 진짜 염불한다고 하는 이라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러니 경전에 나와있는 미덕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이미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글 적은 이가 말한 것처럼 보물이 있다. 그런데 그 보물을 더 값지게 만드는 것이 제행에 있다고 보는게 더 불자답지 않겠는가. 제행이 별 것 아닌듯이 말해도 어떻게 살아감이 부처님의 뜻일까를 생각하면 스스로 하는 말이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글을 마무리할까 했는데 달리 생각드는 부분이 있어서 추가한다. 상품상생에서 하품하생까지 9개의 품위 중 위의 다섯가지에는 염불을 말하지 않는다. 중품하생부터 하품하생까지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이야기, 염불이 나온다. 어떤 의미일까. 염불만 해도 극락에 간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원력과 딱 맞아떨어진다. 또 우리가 극락왕생하면 거기서 부처님의 법을 배우며 즐겁게 수행하여 성불에 이른다. 이미 수행의 경지를 이룬 이들이 상품상생부터 차례로 나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글은 앞에서 적었듯이 정토삼부경을 많이 읽지 않은 염불행자의 개인생각이며 다소 정리되지 않아서 읽기 매끄럽지도 않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정리해서 적을수도 있을 것 같다. 늘 이야기하듯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군 하면 족하다.

'201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애인시설 선생님들, 마음의 뜻을 바꾸다.  (0) 2019.04.03
하고 싶은 법보시, 인욕바라밀  (0) 2019.04.03
싫을 때가 있다.  (0) 2019.03.29
자동차 정비를 마치고  (0) 2019.03.29
법문을 읽다가   (0) 201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