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생명치료 희망쉼터) 다음 카페에 올려진 답글을 읽고 적은 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11. 16:59

다음카페에 '말세에 이것만이를 주장하다. 공왕불, 공왕불기도'를 올렸고 그에 대해 어떤 분이 답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 다시 글을 적어 게시했는데 블로그에 옮깁니다.




이 글은 앞선 글(공왕불, 공왕불기도)의 연장선상의 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제목봉창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입니다. 글을 적은 것은 생명○○○○○○ 카페에서 법화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상하다는 지점을 적어 인연된 누군가가 읽어보고 자신이 스스로 경전을 읽고 생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글의 논점이 그러한데 공덕을 운운하며 논점을 가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답글을 길게 적고 있지만 이상하다고 적은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경전의 가르침을 근거로 답변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법은 단지 공덕을 운운하고 인연을 운운하면서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너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너의 불도나 닦으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나의 불도수행에서 멀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한 법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이야기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저도 배웁니다. 지금 불도 닦고 있습니다. 제가 마주한 모든 이들에게 법으로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주장함이 아니고 내가 이해한 법을 말하고 있으며, 그 법이 잘못된 것이라면 고쳐배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고쳐 배울 것을 말하는대신 논점을 벗어난 이야기로 시각을 흐리는 것 같습니다. 법을 들어 이상하다 했으면 법을 들어 그 의문점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카페에서 말하는 불교가 다른 불교와 다르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다르다면 누군가 진리가 아니겠지요. 다르다면 누군가 불교가 아니겠지요. 진리는 하나입니다. 우주가 부처라 하고 인간이 소우주라 하는 것이 다른 불교입니까? 유불선이 진리라면 결국 하나를 다르게 표현할 뿐인데, 하나의 불교에서 표현을 달리 한다고 다른 불교인 건가요? 제가 생각하기에 다르게 표현해서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난 가르침을 다르게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문제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주가 부처라 하면 괜찮지만, 말세에 제목봉창만 공덕있다 하면 괜찮지 않습니다. 인간이 소우주라고 하면 괜찮지만, 말세에 공왕불(뭐라 하든지요)만 공덕있다 하면 괜찮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괜찮지 않은 말이니까요.


경전을 읽고 사유해보세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이해로 덮인 법화경 해설이 아니라 한자든 영어든 번역된 법화경을 그대로 읽어보세요. (제 경험으로는) 그 두꺼운 법화경이 몇 번 읽는다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읽다보면 지금 주장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과는 뭔가 맞지 않다고는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법입니다. 그것도 최상, 최후의 부처님 가르침인 법화경입니다. 그 법이 무엇이든 바르게 법을 지녀야 공덕도 법따라 밝아지고 오래가며 무량해집니다. 개인적 경험이 수행에 대한 믿음, 정진하는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도 바르게 받아지니는 법을 기초로 하고 바르게 법을 받아지니는 길로 이어져야 참으로 좋은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목봉창해서 삶이 변화했다면 그 제목봉창이 나온 법화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가길 부처님은 바라실 겁니다. 법화경은 우리가 말하는 살아가면서의 가피, 그 이상을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경전을 통해 불법을 바르게 배우고 실천해야 참된 공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목 봉창? 공덕 있겠지요. 불법의 수행인데 없다고 하면 그것이 이상한 말입니다.


저도 제목봉창을 기도라 하든 수행이라 하든 공덕있는 기도,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종수행을 여러차례 언급하십니다. 여기 저기에서 많이 나옵니다. 받아지니고 읽고 해설하고 외우고 사경하고 등등등. 제목봉창은 다라니품에 한번 언급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이 법문의 이름만이라도 지니는 법사들을 수호할지라도 훌륭하기 이를 데 없거늘 어찌 하물며 오로지 전적으로 또 온전히 이 법문만 지니고 또 경문을 경전으로 엮고 나서 경전에 꽃 향 화만 도향 말향 의복 당번과 유등 소유등 향유등 첨복유등 바리사가유 청련유등 수만나유등으로 공양하는 이들을 수호함이랴.' 이름만이라도 지니는 것도 좋은데 다른 것은 더 좋다는 이야기로 이해되지 않습니까? 경문을 경전으로 엮는다는 것은 사경과 멀지 않습니다. 아닌가요? 


그러니 법화경 수행을 인연따라 하면 되지만 제목을 받아지는 것 외의 다른 수행법이 공덕없는듯 표현하면 부처님의 말씀과 어긋나며 배우는 이들이 법을 잘못 이해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 말하는 것이 수행과 법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인지를 묻는 겁니다. 진짜 그리 믿는지, 아님을 알지만 방편으로 그러하다 하는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또 말세를 자꾸 말하는데 말세에 제목을 받아지니라, 그것만이 공덕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미래에 이경을 쓰는 공덕에 대해서는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법화경 수행의 방법을 명확하게 밝히시고 있고 그것은 시대를 한정짓는 것 같지 않은데 아닌가요?


이것만이를 말해도 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불법과 인연되었다면 좋은 일이고 법화경이니 더 좋은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니 그런 말로 인해 부처님 법을 배워나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흐린다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은 다 정법이고 좋지만 이것은 이러해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논조의 글을 써왔고 그것은 법화경을 읽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그리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법을 잘못 전파한 이는 그것을 받는다고 하시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면 그 취사여부는 온전히 저의 몫입니다. 글을 읽은 것도 인연이며, 마음에 일어나는 법화경을 배우는, 또 배울 사람에 대한 내 마음 역시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누군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한 법으로는 이상한 점이 있으니 더 사유하면 좋겠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 밝은 것, 좋은 것 아닐까요? 공덕을 바라든 가피를 바라든 불법에 인연되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으로 가장 큰 공덕과 가피로 이어진다 생각합니다.


상불경보살의 말을 늘 마음에 새깁니다. '그대들도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리 믿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자유롭지만, 마주하게 된 인연에 대해 무엇이 불자의 최선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답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