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보살이 곧 부처?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9. 08:25

보살에 대해 이미 글로 적은 적이 있다. 예전에 법화경 해설을 한다는 어떤 이가 보살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설하고 있음을 알고 나서였다. 얼마전에 보니 여전히 보살이 곧 부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눈과 마음에는 법화경의 구절들이 들어가지 않았나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경전을 풀어갈 정도로 세세하게 읽어나가기를 여러차례일터인데 어떻게 보살에게 부처되리라 수기하는 그 큰 이야기를 놓칠 수 있다는 말인가. 보살이 곧 부처이며 보살이 곧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목표라고 주장한다면 드러난 뜻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제대로 알고 있으니 내 말을 들으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현란해도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스스로 믿고 알린다면 과연 얼마나 좋은 일이 될 것인가. 잘모르겠다. 


법화경을 들어 보살을 말하는 이여, 법화경을 잘 읽어보라. 부처님의 비밀한 설법은 우리가 부처되는 것에 있다. 부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생이 부처되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경은 말하고 있다. 헷갈리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충분하게 사유해야 한다. 보살승, 대승이 부처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이 보살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이해함에 이르러야 아마도 많은 가르침이 더 명확하고 원활하게 마음에 닿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수행이 되면서 우리의 이해는 달라진다. 그러니 내 머리를 주로 하여 이해하지 말고 불성의 이끄심을 주로 하여 내 마음이 바른 법에 열리도록 뜻을 세우고 읽어나가야 한다.  


법화경을 들어 육바라밀을 말하는 이여, 법화경을 잘 읽어보라. 법화경은 하나를 이야기하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다. 경에 나와있지 않은가. 그대의 마음에 닿고 이해된 육바라밀이 법화경의 결론인듯 말하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설하는 부처님의 비밀한 온갖 법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어떤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오래 읽었음을 들어 결국 법화경이 육바라밀로 귀결된다고 한다면 그 모든 소중한 법을 가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법화경은 단지 육바라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육바라밀을 이미 수행하던 수행자가 법화경을 알고서야 비로소 무상정등각에 가까워진다고 경은 말하고 있다.


사실 잘모른다. 나에게 닿는 그 한 자락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이 한 자락도 어쩌면 다시 알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법은 그렇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리 적는 것은 누군가의 편협하고 일방적인 이해로 다른 이의 이해가 한정되는 것을 깨고 싶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라. 우리를 이끄는 불성에 의지하라. 법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칫 교만으로 아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잘못 아는 것이라면 다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법을 대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