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홍익학당)부처가 될 것인가, 보살이 될 것인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8. 7. 29. 19:31

홍익학당 화엄경 강의나 여러 강의를 보다 보면 부처가 되는 것보다 보살 되기를 권한다.
학당의 가르치는 이들의 영적 경지가 높아서 더 바르게 정확히 알아지기에 자신이 깨달은 알음을 주장하는 것이겠지 싶기도 하지만,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그 논리는 조금 의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러차례 언급할만큼 정말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보살이면 어떻고 부처면 어떤가.
스스로를 밝히고 세상을 밝힌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는데(물론 같지도 않지만) 굳이 이것이 낫다, 저것이 낫다고 분별하는 인간의 마음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 역시 부처님 법을 배워오면서 부처와 보살에 대해서 귀동냥한 바가 있어 고민한 적이 있었다.
보살은 인연없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는 인연있는 자만 제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살이 중생에게 더 가까운(?) 존재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모르겠지만, 고민을 거쳐 내린 나의 결론은 이러했다.
부처(개체화된 부처)는 자신의 불국토를 장엄하니 주된 활동처, 영역이 있지만, 보살은 자유롭게 모든 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할 수 있기에 그런 얘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대략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지장경에서 보면 지장보살의 전신을 이야기하면서 두 왕의 서원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옛날에 두 왕이 백성을 가르치며 살았는데, 한 왕은 속히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다른 왕은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한다.
속히 성불하겠다는 왕은 일체지성취여래이고 중생을 제도하고서야 성불하겠다는 왕은 지장보살이다.
누구나 쉽게 하지 못하는 큰원을 세웠기에 지장보살을 대원본존이라고 칭한다.
물론 나역시 지장보살의 원에 힘입어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단해도 안심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에게도 그리 말해준다.
하지만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뜻과 실천에서 일체지성취여래와 지장보살은 같다.
다만 서원이 다를 뿐, 사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더 낫고 저것이 덜 낫다는 생각은 조금은 중심에서 벗어난 견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수준에서는 그렇게 생각된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있겠지만, 다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있을수도 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처럼 참으로 그 수준의 부처님이 되어야 알아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꼭 이것이 맞다고 틀을 만들기보다는 그저 깨달은대로 알려주고 넘어가는 부드러움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우리도 부처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가 되리라는 원을 품고 살아간다.
그 부처의 세계는 모두가 평안하고 모두가 밝은 세계다.
너무 먼 이야기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하지만, 목표가 분명하면 언젠가는 다다를 것이지 않겠는가.
부처로 길을 정했기에 가다 보면 가까워지고 언젠가는 닿을 것이다.

또 최상의 단계에 오르면 더 낮은 경지는 자유자재로 나툴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보라. 10지 보살은 능히 9지의 모든 가능성을 품지만, 9지 보살은 10지를 아우를 수 있는가?
부처의 경지는 보살의 경지를 능히 품는다.
혹시라도 부처가 되어보니 중생제도를 위해 보살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든다면 기꺼이 보살의 길로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개체성을 떠난 비로자나불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때, 즉 그럴 수준에 임했을 때 결정할 일이다.
나에게 부처되라고 말을 건넨 이는 개체성을 띤 부처이고 나 또한 개체성을 띤 부처가 되고자 한다.
그 수준이 되고 나서야 더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관세음보살님은 과거 부처였으나 보살의 모습으로 보살행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부처에서 다시 보살의 모습으로 나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상의 수준에 이르고서 선택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굳이 부처되는 것을 마음에 품지 말고 보살되기를 희망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다.
무슨 뜻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조금은 알겠는데,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
시대에 따른 방편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극락정토에 가서 더 원만한 힘을 갖춘 부처가 되어 다시 세상에 나와 중생제도하기를 꿈꾼다.
그런데 정토에 가보니 평소 내가 생각하던 바가 아니라면, 아미타부처님께 청할 것이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지금 바로 중생을 편안케 하기를 바란다고.
그러니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부처면 어떻고 보살이면 어떤가.
하고자 하는 일과 뜻이 다르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부처가 되어 모든 가능성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겠다.

부처가 되는 길에서 우리는 보살의 옷을 입는다.
보살의 길에서 우리는 부처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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