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의 종류를 말할 때 무주상보시가 최상의 보시라고 한다.
지장경에 보면 공덕을 법계에 회향하는 것과 가족이나 자신만을 위해 회향하는 것을 비교하여 만에서 하나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몇일전인가 문득 공덕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왜 무주상보시가 최상의 보시라고 하고 왜 같은 행위에 대한 공덕이 회향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었다. 각자의 다른 이해와 해석이 있을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 들어온 이해와 해석이다. 그러니 말이 되는 소린가를 따지는 것으로 힘을 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바람이 불면 불었구나 하고 지나가듯 가볍게 지나가도 될 그런 이야기이다.
불교는 마음공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마음이 모든 것을 그리고 짓는다고 한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마음이 짓는 그것대로이다. 하나의 틀을 만들어 가두면 하나가 되고 백의 틀을 만들어 가두면 백이 된다. 무주상보시는 그런 틀이 없는 보시이다. 어떤 것으로도 틀을 지을 수 없으니 공덕이 무량하다. 헤아림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가족에게 회향하고 자신에게 회향하면 그 만큼의 공덕으로서의 틀을 갖는다. 하지만 펼쳐진 법계에 회향하면 법계만큼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도가 공덕의 이면에 존재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조건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가 우리의 공덕을 결정짓는 변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어떤 보시를 하겠는가. 어디에 공덕을 회향하겠는가. 마음 자리를 공덕이 따라간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201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의 독기 (0) | 2018.12.21 |
---|---|
혼자만의 수행이 아니다. (0) | 2018.12.19 |
기도가피, 수행(독경, 다라니, 염불)해서 삶이 좋아졌다는 이야기 (0) | 2018.12.18 |
끝나지 않은 의문, 천태종 (0) | 2018.12.16 |
남묘호랑게쿄 글에서 하고 싶었던 말 (0) | 201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