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공왕불교와 법화경

향광장엄주주모니 2020. 4. 9. 16:34

먼저 댓글에 대하여 본글로 답함을 양해바랍니다.

긴글이 될텐데, 글자가 작아 보기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본글로 올립니다.

앞서서 공왕불교가 법화경이 아니라고 글을 적으니 어떤 분이 댓글을 다셨어요.


1. 법화경 = 공왕불교, 공왕불교 = 법화경, 공왕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석을 한적 없다고 합니다.


네, 맞을 겁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공왕불교가 아니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닌 듯 말하거나, 법화경 가르침의 정점에 공왕불교가 있는듯이 말하는 그런 논조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마음에 담아 주장하는 이야기가 자신들만이 법화경의 정수에 닿아있는 듯 말하니 결국은 이 공왕불교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은 법화경 공부자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2 공왕불이라는 단어는 법화경 수학무학인기품에 딱 한번 나온다, 이것도 모르면 불자라 할수 없다, 석존께서는 법화경 수학무학인기품에서 최초로 '공왕불'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석존이 믿으신 부처님이 바로 대우주의 부처님인 공왕불이라고 하신 대목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음... 먼저 경전을 직접 읽어는 보았는가를 묻고 싶어집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의 웃음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공왕불을 가지고 모카페에 사람들이 글을 올릴 때 그 공왕불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처음 의문을 제기하고 수학무학인기품에 한번 나온다고 말한 당사자가 저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제 질문에 대해 대우주부처님을 그냥 공왕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말하더니, 제가 글 적은 이후 공왕불 기도하시는 분들이 수학무학인기품을 언급하기 시작하더군요. 재밌죠.

그런데 직접 읽어보고 그런 것임을 확인하고 적으셨나 궁금하네요. 경에 딱한번 나온다는 부분이 이렇습니다. '선남자들이여 나와 아난은 공왕 여래 응공 정변지의 처소에서 동시에 무상정등각심을 일으켰느니라. 그 당시 선남자들이여 아난은 항상 부지런히 많이 듣기를 좋아했지만 나는 항상 스스로 부지런히 정진하였느니라. 이런 까닭에 나는 더 빨리 무상정등각에 이르렀지만,...' 이 부분입니다. 읽어보니 석존이 믿으신 부처님이 바로 대우주의 부처님인 공왕불이라고 하신 대목으로 이해됩니까? 글쎄요. 법화경에는 많은 보살들이 찬탄하는 많은 부처님들이 나오는데 왜 이 부분에 와서 이 공왕여래가 대우주 부처님인 공왕불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나요? 

   

3. 지금 시대는 불교 말법시대고, 말법에는 공왕불 부처님만 믿어야 하고, 말법에는 법화경 가르침만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또 신라시대 원효대사, 중국의 천태대사, 묘략대사 등 선각자들도 모두 언급하신 대목이라고 하네요.


일단 대사님들 이야기는 모르겠구요, 언급하신 대목이라고 하지 말고 그 언급하신 대목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인용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러더라는 말이 참 편하고 쉬운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또 이것만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스스로 그런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에 대한 확인, 사유가 충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직접 대사님들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일 필요성을 지금은 못느낍니다. 왜냐하면 제가 배워온 법화경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비추어도 이상하다는 소리가 나오거든요. 물론 법화경의 가르침은 최상이죠, 누군가 성불한다면 그 가르침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 말법시대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말법에는 공왕불 부처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아주 많이 이상해집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그런 말은 법화경에 없을 뿐더러, 부처님의 자비에 맞지 않을 뿐더러, 부처님의 경전들과도 완전히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왜 진리는 하나인데 만법이 필요했을까요? 근기 다른 중생을 다 교화하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그런 것입니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원력만 믿어 부르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의 즐거움 속에서 성불을 위한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아미타불은 법화경에도 나오니 부정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법화경을 설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말세에 모든 경이 다 사라져도 이 아미타불에 대한 경전은 얼마간 더 남겨놓으신다고 하셨어요. 법화경이 사라져도라고 이해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성불을 위해 펼쳐놓으신 모든 길들이 정법의 길이며, 그 길에 들어 부처를 따르면 결국 하나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그 길에 법화경이 있고 성불이 있습니다.


4. 공왕불을 믿고 법화경 가르침만 따라야 하기 때문에 법화경과 공왕불교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공왕불을 믿고 법화경 가르침만 따라야 한다는 그 전제가 이상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법화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공왕불의 논리가 공왕불교의 바탕이므로 그 상태에서 법화경과 공왕불교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사견없이 법화경에 들어가려는 이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법화경 기도를 먼저 해보시고 공왕불교를 판단하시기 바라며, 기도는 어렵지 않아서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 딱 네 문장이라고 하네요. 참고로 절에 오래다니신 분은 이 기도가 어렵고 왜 어려운지도 나중에 말해주겠다 합니다.


기도가 어렵고 안어렵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좋은 것이라면 어려워도 하는 것이 맞는 것이고 오히려 바른 것을 훼손할 수 있겠다 싶으면 아무리 쉽고 좋은 것이 넘쳐난다 해도 하지 않을 이유가 충분해집니다. 법에 대한 일이며 그것은 과보가 매우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름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있고 일념에 머무는 공덕이 있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지 모르지만(가피를 앞세워 기도를 주장하니 말입니다) 바른 것으로 통한다는 확신보다 찜찜함이 앞선다면, 바르다고 확신되는 것으로 정진하는 것이 불자의 용기, 지혜일 것입니다.


6. 참고로 나무묘법연화경은 책 이름 봉창이라 책이름 종일 불러봐야 효과없고 석존이 외치신 원어인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 이렇게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묘법연화경' 검색해 보면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 이렇게 나온다고 하네요.


음... 자, 질문. 어떤 과일이 있어서 나는 애플이라고 하고 당신은 사과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 효과라고 하면 참 괴상한데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실체가 달라질까요? 효과가 달라질까요? 아니죠. 우리 앞에 있는 새콤달콤한 놈을 사과라고도 하고 애플이라고도 하니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배를 가져와서 애플이라고 한다면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지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만약 듣는 이가 영어를 몰라 내가 애플이라 할 때 못알아듣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우리가 법을 배우는 부처님이 어디 그렇습니까. 말이 달라도 실체가 같다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 질문. 이게 다른 말일까요? 묘법연화경(한자를 우리나라말로 읽은 것)과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산스크리트어로 읽은 것), 나무묘법연화경(한글음으로 읽은 것)과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산스크리트어로 읽은 것).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냥 나라말이 달라 다른 소리로 읽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더 나아가봅시다. 이것을 경전이름이라도 하면 정답이죠. 그것이니까. 또 경전은 곧 법이니 법이라 해도 정답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법은 법신, 곧 부처님이니 부처라 해도 정답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부른다고 격하게 주장하면 좀 이상해지죠.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비틀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또 질문. 석존이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라고 외쳤어요? 어디에 그렇게 나오나요? 제가 법화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런 것은 없어서 궁금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을 엿볼 수 있는 여러가지 수행의 모습들이 법화경에 나오지만,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를 외쳤다고 볼만한 것은 솔직히 없거든요.


7. 이렇게 적어 글을 주고 받았습니다. 다 말장난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움직이고 뒤집히죠. 너무 당연한 것도 귀에 걸어 귀걸이, 코에 걸어 코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까요? 그나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이 아난에게 당부하셨듯이 우리 안의 불성이며,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인 법입니다. 그러니 불자는 법을 가까이 하며 우리의 불성이 발현되도록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쉽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 경전입니다. 그 경전을 읽어야 하며 누군가 가르친다고 해도 경전을 읽어가면서 나름의 사유를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취할 바를 취하고 버릴 바를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맹목은 탐진치와 동류로 아주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