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교학적이라는 말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7. 9. 22:10

나에게 끊임없이 글적어오는 한 사람으로 인해 적는 글이다. 법에 대한 이해를 나누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면 좋겠다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찌보면 모든 것이 법이니 이 또한 법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시공불교사전에 보면 교학은 경론(經論)이나 한 종파에서 설하는 가르침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이론적 방면을 뜻한다. 이외에도 교학에는 교육과 학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가르치고 배움이라는 뜻이 있다. 그럼 교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가 적어놓길 이론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 다시 말해 책에서 전달하는 이론적인 지식만을 알고 넘어가는 사람을 교학적이라고 한단다. 아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글로 적자니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교학적이라고 말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한번 찾아보았다. 그런데 글대로라면 나는 그다지 교학적이지 않다. 글로 배운 지식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글로 배우지만 사유하고 생활하면서 그 지식을 실제로 체험하고 체험을 통해 내가 이해한 지식, 다시 말해 삶을 통해 이해된 지식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 여기기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말이 아무리 현란해도 그 속에서 부처를 느끼지 못하면 편하지 않다. 말로만 머리로만 아는 것은 내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다. 또 남의 깨달음이 내 깨달음이 될 수 없으니 단순히 다른 이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각한다. 내 마음에 닿아 참으로 그러하다는 일체감이 드러날 때 조금 아는가 할 수 있다. 그리 나를 살피고 비판하면서 이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통찰력이 날카로워질 때까지 공부 더 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나에 대한 이야기다.


자, 이제 글 적어온 이의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교학적인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근기높은 선지식들이나 펴고 전할 수 있지 우리같은 하근기들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불법은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리 말하는 당신이 법을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끝난 일이다. 이해도 못한 법을 무엇을 가지고 말하려 하는가.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글을 쓰면 안되지 않겠는가. 이해도 못했는데 무엇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가르치려 하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불법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 자가 글마다 다른 이를 지적하면서 왜 잘못인지 자신이 아는 법의 논리로 끊임없이 가르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이 이해한 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옳다는 생각에 견고한 것이다. 맞지 않은가. 말을 이리 저리 돌리지만 결국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을 다른 이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어떤 것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직면하는 것이 불자에게는 필요하다.


그가 적는 글들은 여러가지 용어를 써서 표현하므로 편하지 않지만 대략 이해가능하며 새롭지 않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다는 아니더라도 대략은 나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는 가르침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 나에 대한 의견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치우쳤다는 생각, 때로는 지금 내가 이해한 불교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지적의 글에 크게 걸리지 않는다. 나에게 말하길 법에 대한 근기, 이해에서 자격이 갖춰지지 않으면 법을 펴면 안되고 전해도 안된다고 하는데 이미 글마다 적어 자신이 이해한 법을 바탕으로 다른 이를 지적하는 자신은 어떤 근거로 법을 말하고 전해도 괜찮은 것인지 궁금하다. 누가 그에게 그렇게 법을 말하면서 지적해도 당신은 괜찮다고 허락한 것인지 말이다. 교학적이라는 것은 이론적 지식에 그친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것이 없다는 의미,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친다는 의미와 가까울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불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선지식의 논서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므로 절절하게 자신의 이해가 없는 그가, 자기가 받아들인 법의 이해를 바탕으로 말하면서 다른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당신은 틀렸고 당신은 법을 펴면 안되고 당신은 법을 전하면 안된다고 끊임없이 적어오는 그가 이론적 지식에 그친 교학적인 이의 모습은 아닐까.  


불자는 자신이 하는 말과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게 첫번째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밖을 향한 잣대를 먼저 자신에게 대어보고 나서 말할 것이며, 만약 그것을 놓쳤다면 말한 이후에라도 다시 그 잣대를 스스로에게 대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또 개인의 말은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만약 상대가 경전의 부처님 가르침을 들어 말한다면 그 부분만큼은 무게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글을 적는 것이 바른 것을 찾고 나누기 위함이라면 적는 글 가운데 부처님 가르침이 들어가는 순간 딱딱한 마음을 버리고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내 주장하기 위해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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