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예수님의 '구하라'와 부처님의 '구할 바가 없다'라는 말을 들어 글을 쓴 것을 보았다. 그분의 글과 상관없이 '구하라'와 '구할 바가 없다'에 대한 내 이해를 적어보고 싶어졌다.
예수님의 '구하라'는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추구가 아닌 원력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스님들의 법문에도 원력을 세우라는 내용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법화경을 읽으면서 원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과거의 원이 그러했기에 미래의 일들이 그렇게 결정되어지는 이야기가 법화경에 나온다. 법화경을 잘모른다면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생각하면 쉽다. 부처님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운 48대원으로 인해 우리는 부처님 이름을 불러 극락왕생할 수 있게 되었다. 원을 세웠고 그 원대로 이루어졌다. 근기가 높을수록 원은 실체를 형성하는 힘을 갖는다. 마치 흩어지는 햇빛을 한곳으로 응집시켜 불을 일으키는 돋보기처럼 원은 잔잔한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실현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가만히 있는다고 무엇인가 이루어질까? 원을 강력하게 세우면 그 원이 원력자의 상황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구하라. 구해야 구해진다. 뜻을 세워라. 그래야 법계가 움직인다.
부처님의 '구할 바가 없다'는 공의 도리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일체법이 공하니 실체가 없다. 그러니 구할 바도 찾을 바도 없다. 허공같은데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법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구할 바가 없다'는 부처님 말씀이 설명하기 어려워도 마음에 와닿는다.
한편으로는 구하라고 하고 한편으로는 구할 바가 없다고 한다. 둘 다 맞다.
'구한다'라는 동일한 표현에 힙입어 '구하라', '구할 바가 없다'를 하나의 선상에 두고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글쎄. 내 수준에서는 어렵다.
지금은 각각의 의미를 사유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