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을 읽으면서 '나는 연기법을 설하다가'의 구절로 이미 두 개의 글을 작성했다. 적은 듯 하여 찾아보니 이미 두 번을 적었다. 글을 적는 순간의 생각과 마음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 같다. 법을 대하는 내가 변하기에 보이고 들리는 바가 같은 가운데 달라지는 것 같다. 왜 이미 적었음에도 다시 세 번째일까. 그만큼 마음에 닿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말하고 싶게 만드는 상황을 만나기 때문이리라.
나는 연기법을 설하다가
때가 이르면 비로소 부처의 깨달음을 보이나니
이것은 나의 위없는 방편이요
세간의 일체 도사들의 방편 또한 그러하니라
누군가는 자신이 안다는 부처님의 법을 말하며 연기법이 최종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그러한가. 물론 그러한가를 두고 따지는 것이 불편한 일,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든 법이 정법이며 하나의 법을 향하고 하나의 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이하거나 대립되는 듯한 법마저 하나의 법 안에 존재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면한 지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새기는 것은 의미있다. 명확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법화경을 읽어 대략 맛보게 되는 부처님의 뜻을 새겨보건대 연기법은 법의 최종이 아니다.
위의 게송을 읽어보라. 연기법이 최종이라고 이해되는가. 최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있다. 연기법이 최종이라면 이미 다 보였는데 더 이상 보일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연기법을 설하다가 때가 이르면 부처의 깨달음을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간 부처님들의 방편이라고 했다. 그러니 연기법은 과정에서 만나는 것, 하나의 이치(?)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보이고자 하시는 것은 연기법을 넘어선 지점에 있다. 오늘 내가 적는 이 글은 하나의 구절을 빌어 말하고 있지만 하나의 구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법화경을 읽어나가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이야기를 잘 읽어보라. 부처님이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마지막 경전, 최고의 경전이라는 법화경은 연기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모든 법을 그 안에 담고 있지만 그 모든 법을 관통하여 최종적으로 부처님께서 알리고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부처님과 대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것이 성공적인 대화라 할 것인가. 상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야 성공적인 대화에 이를 수 있다. 그런 대화라야 서로가 참으로 미소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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