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는 마음이 많았다.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왜 그러한가를 생각해보았다.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건강하게 자란 어른은 어떤 환경이 닥쳐도 문제없지만, 면역력이 충분하지 않은 아이는 환경을 가려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직은 충분하게 건강하지도 안정되지도 않기에 그 부분에 대해 예민한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기도를 하기 전보다 마음의 좋은 변화가 생긴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 기도에 대해서 의구심을 표출했었는데 얼마나 폭넓은지 모르지만 과거보다 좋은 변화가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끝이 어디로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부처님의 기도수행은 기도에 의지하여 복을 얻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불성의 지닌 자로서 한 몫을 다하도록 하는 것에 최종 목적을 둔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만 그래서 바르지 않는 이해로는 한계가 생긴다는 것을 적지 않을 수 없다. 부처가 되는 가르침을 두고 부처님의 가피로 현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그 가피를 얻기 위해 기도를 떠나면 안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법화경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법화경의 존재 이유가 아님을 안다.
요즘에 여러차례 적고 있는데 근기라는 것이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것을 읽어도 다르게 이해한다, 마치 신묘한 보배가 있는데 지니는 이의 능력에 따라 그 보배의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가 못누리는가가 갈리는 것과 같다. 보배의 참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면 나의 능력을 키우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적을 수 없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업을 부지런히 쌓아나가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노는 물을 달라서 나누지 못한다는 표현을 읽었다. 맞다. 근기가 갖춰져야 닿을 수 있다. 또 법화경에 보면 우리 지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뜻을 지니고 부처님을 믿기에 이 법문에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그대는 좋은 뜻을 지녔는가. 부처님을 진실로 믿는가. 오늘은 자신이 어떠한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마음의 좋은 변화는 환영할 일이지만,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지 못한다면 목적지를 모르고 배에 올라 만족감을 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길을 가는 주인으로 마음의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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