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무의식을 다스리는 것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8. 13. 09:45

오늘은 카페에서 글을 여러 개 읽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읽고 일어나는 생각을 적고 있다.

그 글 중 이런 글이 있었다. '기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의식을 다스리기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 그런가.


수행과 무의식에 대해서 조금씩 적어온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인다. 내가 불법의 수행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불성에 닿는 일이며, 무의식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을 넘어선 곳에 있으며 쉽게 접근하고 변화시키기 어렵다. 무의식은 드러나는 현상을 움직이는 큰 힘을 가지고 있기에 현상을 온전히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다스려져야 한다. 그러니 무의식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중요하다. 그것을 나는 불법의 수행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경전을 읽어 그 의미를 새기고 그대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염불을 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가운데 의식이 변화한다. 그 의식의 변화가 지속되어갈수록 점차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얼마나 닦아야 그 무의식의 영역이 온전히 맑고 밝아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글 적은 이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하나는 무엇을 가까이 할 것인가이다. 마인드 파워에 대한 수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것이 근본은 아니다. 무엇이 되었든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저변을 흐르는 모든 이치를 통찰하는 법을 가까이 하고 그 법에서 답을 찾는 것이 좋다. 핵심을 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뻗어나간 모든 것에 자유롭지만, 핵심을 벗어난 것에서 답을 찾는 사람은 조각그림을 맞추는 것처럼 답답함을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사례를 만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배우고 참고할 만하다 여기겠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아우르는 핵심을 만난다면 어떨까. 수많은 책과 가르침 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핵심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수행자가 여러가지 종교를 돌아 돌아 결국 불교에서 안식을 얻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보물을 쥐고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의 근기, 인연 아닐까. 참 신기하다. 근기가 무르익어야 맛볼 수 있다.


또 기도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이다. 무엇을 위해 책을 읽고 기도를 하는가. 그는 뜻하는 바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시때때로 이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바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가족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자신의 일들이 편안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고 등등. 그런 원들이 실현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기도가 되었든 독서가 되었든 원의 실현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순간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사랑하고 우리의 본성이 기뻐하는 소망은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모든 이들이 참된 유익과 평온에 이르는 것, 그것을 세상과 불성은 바라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불교 수행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출발하더라도 때가 되면 점차 본성이 일깨워지니 기도의 깊이가 달라진다. 그런 변화를 경험해야 기도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독서로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수행으로는 훨씬 쉽고 빠르니, 세상의 책과 비교할 수 없는 힘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어찌보면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 기도수행은 어떤 이가 방향을 정한 이후에 그렇게 가고 싶다고 바라는 것에 대하여 그의 방향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살펴 잘못된 방향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일이 된다.


각자의 선업에 따라 현생이 다른 것이므로 지금 모습에 걸맞는 방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나의 이 생각이 지금 그에게는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길을 돌아돌아 결국은 불교의 자리로 돌아온 수행자처럼 많을 길을 돌아돌아 다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근본을 다스리는 답을 얻을 날이 있기를 바란다. 자신이 적는 글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아차린다면 답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기도를 가벼이 여기듯이 어떤 기도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도로 충분하지 않아서 독서를 해야 한다고 하면 많이 이상하지 않겠는가. 주장하는 기도가 바탕으로 삼는 경전에 보면 세상의 지식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