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얘기를 빌어 적는 글이므로 마음 불편할 분들은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문득 인터넷 쪽지를 확인하다가 느땡님이 보낸 쪽지를 다시 읽게 되었다.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읽지 않은 부분이 상당했다. 무엇을 적었는가 읽으면서 든 생각을 적어보려한다.
쓸데없는 담론으로 아무것도 모른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선동하고, 당신의 글을 봤지만 깊이와 체험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바른말. 보기좋은말. 유식한체한 말 밖에 없소이다. 한마디로 거짓됐다는 말이외다. 본인이 하는 말처럼 진정 느낀다면 그건 보살이지.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 못차리고. 나이도 꽤 있어보이는데 정신차리고 사소. 시간은 금이다 했소. 사람들 선동하는 짓 그만하고 되도않는 보살흉내 되도않는 공부 그만하구 내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점검하구 다른이의 기도까지 간섭하며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인간이라. 고통받는 삶이 어떤지 전혀 알지못하면서 나대기는. 법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소. 인과법은 한치의 어긋남없는 무서인것이거늘. 그것도 법을 들먹이며 제대로 알지도못한 것을 다 아는냥 떠들어 대는 모양이 한심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그동안 지은 죄도 없어지지 않았거늘 또 죄지을 짓을 골라 하는구나. 업은 지은대로 갔다했고 그중에 제일 무서운 업이 법을 갖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선동하고 아는체하고 아픈사람들을 더 아프게 더 고통스럽게. 당신의 말로 어떤지. 세세생생 어떤 처벌을 받는지 난 지켜보겠소. 아직 벌을 받지 않는다고 그 혓바닥을 놀리나 본데 인과를 받을때까지. 그 상황이 올때까지 기다릴뿐 빌고빌어 참회해도 모자랄판에. 에 휴. 본인의 가벼운 머리와 가벼운 지식과 가벼운 혓바닥은 법계 앞에서 결코 가볍지 않거늘.
신기하다 느낀다. 내가 쪽지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뒷부분 밖에 보지 못했었다. 오늘 쪽지를 확인하다가 문득 열어본 느땡님의 쪽지는 양이 상당했다.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1. 참 심하게 말을 했구나. 이 말을 어떻게 다 감당하려는가.
짐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법을 대하는 이들은 인과를 운운할 때 자신 역시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 담지도 못하고 지우지 못할 말은 이미 법계에 새겨졌다.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진실하며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이 퍼부은 악담의 과보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게 느땡님이 말했듯이 한치도 오차가 없는 인과의 무서움, 법계의 무서움이다. 그걸 정말 진심으로 알았다면 아무리 나에 대해 그리 생각했더라도 이런 말을 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과에 사무치면 그렇게 된다. 함부로 하기 어렵게 된다. 내가 왜 나를 헐뜯는 사람을 대하더라도 강하게 말하지 않는지 아는가. 법화경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모두가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움에 담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법화경을 배우는 이들에게 하신 부처님의 당부이기 때문이며 이런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과의 이치, 법계의 이치가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악담이라니. 쏟아버린 이 말을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2. 내가 그 날 이 쪽지를 다 읽었다면 심리적인 타격이 있었겠구나. 아마 기분이 상했을 것이고 나 역시 더 감정적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있겠구나. 법계의 배려인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불자에게 우연은 없다고 생각한다. 도에서 말하길 칠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도 잡힐 사람 보고 잡힌다고 했다. 그 정도로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뿐 이치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이 쪽지의 부분을 전체로 이해한 것이 감사하다. 지금은 이 글을 다 읽어도 감정적으로 영향받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저런 말을 입에 담는 상대에 대해 놀랄 뿐이다. 원래 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인가보다 싶긴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튀어나오는 것은 변화를 위한 1단계이다. 숨기고 가리던 것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 더 악화될 것인가의 지점에서 어떤 것을 가까이 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3. 늘 진심으로 적는 글이니 나는 지금 잘해나가고 있구나.
나를 비난하는 이들이 던지는 비난 속에 저런 경우가 있다. 너의 글은 진정성이 없어. 너는 글로 불교를 배운 것 같아. 솔직히 기뻤다. 왜냐하면 말하는 법이 공부한 이들이 보기에 흠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모든 글은 경전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경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 사유를 거쳐 내 마음에 닿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리 말하면 꼴불견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최고의 칭찬으로 들린다.
지금 쪽지도 그와 다르지 않다. 경전을 주로 읽고 염불을 한 나에게 바른말, 보기 좋은 말, 유식한 체하는 말을 한다 하니 칭찬 아니겠는가. 말하는 법에 흠이 없다는 말과 가깝다. '본인이 하는 말처럼 진정 느낀다면 보살'이라는 말이 최고로 기쁘다. 진짜 그런 것인가를 오히려 묻고 싶다. 왜냐하면 글은 내가 공부하고 살아가면서 경험한 부분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글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알아차렸다고 늘 그 상태로 머물지 못하고 지금도 여전히 수행중이다. 그래도 그가 읽었을 글은 나의 진심일테니, 다시 말해 글처럼 정말 느끼니 나는 보살이 맞지 싶다.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글이 나에게 와서 칭찬이 되었다는 것을 아마 느땡님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든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이 착각은 내 세상을 더 밝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문득 읽은 쪽지에서 걱정도 기쁨도 일었다. 이 쪽지를 나에게 던진 이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다시 적지만 바른 것은 좋은 것이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개인의 안위를 주장하든 깨달음을 주장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한다면 경전을 통해 제대로 배워야 한다. 신묘한 현상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나를 드러내고 내세우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손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인과를 말하는 자가 쉬운 기도를 운운하는 것은 많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강하게 인과를 믿고 주장한다면 오늘 내가 들이는 공 하나하나가 쌓여 복을 이룬다는 것을 말해야 하지, 강력한 기도, 쉬운 기도를 말하면 흐리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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