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초목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가섭이여 여래가 설한 법을 들은 중생이 법을 기억하여 지니고 스스로 정진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알거나 느끼거나 깨닫지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가섭이여 오직 여래만이 저 중생이 누구인지, 어떠한지, 어떤 종류인지 여실히 알거니와 중생이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으로 인하여 기억하며 또 중생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으로 인하여 생각하며 또 중생이 무엇을 이루고, 어떻게 이루고, 무엇으로 인하여 이루는지 알기 때문이니라. 가섭이여 여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일체를 통찰하지 못하나니 마치 풀과 수풀과 약초와 나무들의 상중하가 다른 것처럼 저마다 다른 저 중생의 경지를 누구도 밝게 보지 못하느니라.'
다른 글에서 위의 구절을 적은 적이 있는데 이 구절은 불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안다고 확신하여 잘못된 생각과 언행을 일으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떠한지 어떤 종류인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기억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생각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이루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제대로 알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같은 공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지만 내가 어떠한지 모르고 상대가 어떠한지 밝게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시각으로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을 읽고 사람들을 대하면서 위 구절을 절절하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알아진다 여겨지는 순간이 있긴 하다만, 그가 어떠한지 밝게 아는 것인가, 내가 어떠한지 밝게 아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러하다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면서 나를 넘어서서, 우리, 우리를 넘어서서 모두에 그 마음이 닿아가는듯한 생각이 이는 것도 같은데, 뜻과 마음이 커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마치 근기품 장자의 아들이 작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큰 것을 바라게 되듯, 작은 초목에 만족하지 않고 큰 나무에 뜻을 두게 되는 것도 같은데 그럼에도 내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다 같은 불자이지만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러니 종류 다른 지금의 상대를 바라보며 비난하는 것이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것 같다. 때가 되면 다 부처되지 않겠는가. 그것을 마음에 새겨 당신 이상하다 말하기보다 밝은 미래를 주장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오늘은 스스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누구인지, 어떠한지 어떤 종류인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기억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생각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이루는지 말이다. 명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외부로 펼쳐진 온갖 판단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는 성급한 판단들을 안으로 돌리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혹여 알아지더라도 그것이 지금일 뿐임을 이해하고 부처될 날들을 기원하는 마음에 머물었으면 좋겠다.
글적고 보니 역시 쉽지 않다. 좋은 길로 가자고 여러가지로 외치는 가운데 다른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을 것인데 어찌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까. 아마도 마음이 어떠한가,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더 면밀히 살피는 것이 필요하리라. 이것도 살아있는 공부겠지. 모든 것이 불성의 자비와 지혜에서 나오고 돌아가기를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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