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에는 선업, 악업,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이 있다. 업에는 그 과보가 따른다.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통해 배우는 이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보자. 부처님은 지악행선,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신다. 또 부처님의 품성을 자비라 할 때, 자비는 악과 멀고, 선과 가깝다. 부처님 뿐이겠는가. 자비를 품는 모든 대상의 일들이 악과 멀어지고 선과 가까울 것을 요구한다.
불성 자체는 악도 선도 떠나 있다. 단지 공할 뿐이므로 모든 것이 인연따라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그 불성이 세상으로 들어오면 지악행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표현하기 미묘하나 그러하다. 아니 통찰하여 알지 못하기에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래도 내 근기에서 닿아있는 것을 말하자면 공한 성품이 자연스럽게 색을 입는 것과 같다 표현하고 싶다. 물론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표현일 수 있다. 불성은 그 자체로 공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출현하여 고통받는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니, 공한 것에서 일어난 자비가 없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 없었을 것이다.
선도 악도 불성에서 보면 다를 바가 없으며 불필요한 분별에 불과하다. 그런데 불성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자비의 품성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 생각한다. 그래서 선을 행해야 하고 악은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을 통해 근기가 자라나고 결국은 근원인 불성의 자리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선업은 좋은 것이다. 그것을 선도 악도 아닌 불성의 성품을 빗대어 의미없다고 하거나 헷갈려 한다면 핵심을 벗어나서 헤메는 일이 될 수 있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만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일을 우리를 이끄는 불성이 기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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