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산란한 마음을 버리고서
이 무상경을 듣게 할지니
왜냐하면 이 경은 듣기도 어렵고
믿기 또한 어렵기 때문이니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물을 얻고자
메마른 토지에 우물을 파러 가거늘
아무리 파고 또 파도 오직 마른 모래만 보면
생각하되 물이 아직 멀구나 하나니
파면서 나오는 마르고 흰모래가 바로
아직도 물이 먼 징조니라
그러나 점점 축축하고 부드러운 모래를 보면
결정코 물이 아주 멀지 않음을 알게 되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이 경을 아직 듣지 못했고
또 거듭하여 곰곰이 생각하지 못했다면
불지혜에서 심히 멀지만
만약 이 깊고도 깊은 경이요
경들의 왕이요
성문 제자들을 위한 이 마지막 경전을
이미 듣고 곰곰이 생각한 이들은
슬기롭고 불지혜에 가깝나니
마치 젖은 모래로
물이 가까움을 아는 것과 같으니라
오랜만에 글을 적습니다.
게으른 가운데 뒤로 물러남만 있을까 싶은데 지나고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과정이 버릴 것 없이 다 의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늘 좋습니다.
한동안 경을 읽지 않았는데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결국은 다시 돌아와 안착하게 됩니다.
다른 경전도 읽고 다양한 진언도 해보았는데 여전히 법화경이 중심에 있는 것이 저로서는 편안합니다.
모든 수행법이 큰 틀 안에서 조화롭기를 발원합니다.
게송에서처럼 우리는 법화경을 만나야 비로소 불지혜에 가까워집니다.
모든 부처님들이 세상에 나오신 일대사인연은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혜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화경은 일대사인연의 경전입니다.
성문도 벽지불도 보살도 아닌 부처되기 위한 법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큰 흐름에서 보면 자잘한 것들은 다 순응합니다.
마치 큰 골격을 세우면 작은 부분들이 제자리에 수월하게 맞춰지듯 작은 부분들의 의미가 그대로 명확해지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이 법화법문을 설하시면서 법화경이 우리 지혜로 들어갈 수 있는 경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게송에서처럼 법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부처님을 믿으며 유순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마음자리가 바탕이어야 합니다.
며칠 전 네이버 카페 법화경 오종법사회에 오랜만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번역 / 해설을 올리던 이가 어떤 이와 논쟁하는 글도 있고 법화경에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하는 듯했던 이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올린 글도 있었습니다.
논쟁하던 이는 법화경이 보살을 가르치는 경이 아니라 보살이 되게 하는 경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 스스로 어떤 한계를 느낀 것인지 보살이 부처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그 범위가 아주 넓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해설하려면 보살로 번역되는 부분에 각각의 추가 설명을 다는 것이 좋겠지요. 예를 들어 보살(부처와 다를 바 없는 수준), 보살(이제 막 보살이 된 보살) 등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그런 해설은 법화경의 가르침에서 보면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보살은 보살이고 부처는 부처이며 법화경은 궁극적으로 부처되게 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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