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법화경 제목 부르는 공덕이 가장 크다?(3)

향광장엄주주모니 2023. 2. 4. 19:24

글쓴이는 '만약 처음부터 공왕불기도가 아닌 법화경기도로 알려졌다면 어떨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부처님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며 기도를 권하기에 갖은 분별과 시비에 휩쓸릴 우려도 없을뿐더러 법화경 가르침의 본질을 흐리는 신도들이 아닌 현재 공왕불을 믿는 사람 모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법화경의 바른 가르침을 알리려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그 고유 가치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루는 생각, 논조가 같다면 공왕불 기도라고 하든 법화경 기도라고 하든 뭐가 다를까요? 제가 그런 기도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의견을 밝혀온 것은 지금껏 공부한 법화경의 내용과는 너무 동떨어진 주장을 한다는 사실과 오히려 가르침대로 수행하거나 수행하려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거나 공격하거나 비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글쓴이의 말대로 자신이 부처님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좋습니다. 이미 많은 불가의 제자가 그런 가르침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특정 기도자분들이 분별과 시비에 휩쓸릴까요? 스스로 분별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경전을 읽었다면 주장할 수 없는 교리(?)를 내세워서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공왕불 기도를 중지하고 제목 봉창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좋습니다.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글로 적었듯이 제 자신이 모든 진언과 성스러운 이름에 대해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경전에는 제목 봉창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서 다만 답을 짐작할 뿐인 상황임에도 '법화경 제목 부르는 공덕이 가장 크다'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내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제목 부르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공부한 바로는 분별심을 떠나는 자리가 법화경이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법화경으로 이미 들어가 있는 이에게조차 새로운 분별심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법이 있고 방법이 있는데 '기도해보니 뭔가 상황이 좋아지더라'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저변에는 무엇이 자리하는 것일까요? 공왕불 기도와 법화경 기도는 무엇이 다를까요?

 

예전에 기도자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면서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0에서 시작한다면 너무 간단한 논리조차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깔려있는 사고의 시스템에서는 아마도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라 느껴지더군요. 어릴 때 장난감 안경 써봤을 겁니다. 안경알에 색 셀로판지를 대면 모든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색을 떼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세상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본질을 흐리는 신도들과 그냥 공왕불 기도자들은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을 법화경 기도라고 했으면 달랐을 것이라는 글쓴이의 말은 글쎄요.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라 하든 대우주라 하든 경의 이름이라 하든 문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니까요. 대우주요, 법이요, 불이요 이것이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법화경을 읽고 나니 그렇게 배워집니다.

 

이름을 바꿨으면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분별심은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법화법문에 들어왔다면 가르침대로 나아가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드러난 뜻을 너머 참된 뜻도 알게 될테니까 말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드러난 뜻조차 받아들이는데 허덕이는 게 현실입니다.


기도 효과와 말법시대 수행법인 염불에 대한 의견을 적으셨습니다. "애시당초 기도효과가 없었다면 무턱대고 공왕불을 믿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경전에 굳이 제목봉창을 하라고 남겨놓지 않으셨더라도 제목을 부르는 것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광우스님 또한 경전을 근거로 말법시대 가장 좋은 수행법은 염불이라고 강조하셨고 동훈스님도 말법의 시대에는 법화경에 의지하며 수행기도 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셨으니까요."

 

일단 기도 효과가 있으니 경전에 없어도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는 점은 사실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 기도가 경을 인연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경에 담긴 가르침을 훼손하는 사상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포교는 믿음을 받아지니는 이의 모습에서 발현됩니다. 믿음을 가진 무리가 그 수행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보일 때 우리는 그들의 믿음에 관심을 갖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물론 믿음의 대상이 바르다면 수행의 무리가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하겠지만 제목봉창을 내세우는 경전적인 논리 토대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명칭도 가물가물하네요. 아무튼 제목 봉창을 제외한 모든 수행을 지나간 수행이라 부정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불보살을 지나간 불보살로 치부하는 식의 주장을 하더군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오래전 제 글에 남겨져 있습니다.

 

아무튼 경전 이름이라 하든 부처라 하든 공왕불 기도를 행한다는 분들에 대해 관심을 꽤 오래 가졌었습니다. 평범하거나 다소 부족하다고 스스로 표현하신 가족 구성원이 기도 후 갖게 된 능력(?), 변화(?)를 말하기도 하고 집중적인 기도로 인한 금전적 가피, 부처님과의 소통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내보이는 언행에서 불성의 발현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가끔 저도 제목 봉창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아주 열심히 기도하신 분들이 보였던 언행이 의구심을 품게 만듭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기도의 효과를 논할 때 단순히 어떤 재앙이 사라지고 복을 이루는 차원으로만 이해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악한 신도 자신을 신봉하는 이에게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려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그래서 바른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와 점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정 내가 귀의할 바른 법인가에 대한 고민이 틈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자신의 기도를 주장하기 위해 다른 기도를 가벼이 여기는 행위에 대하여 어떤 불보살도 찬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부처님들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을 찬탄합니다. 또 모든 부처님들은 다른 모든 수행법을 찬탄합니다. 물론 그중에 유독 법화경은 불지혜, 성불을 밝히는 가르침이므로 최고의 경전이라고 인정받지만 그렇다고 다른 가르침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글쓴이 말대로 특히 말법시대를 논하면서 아미타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광우스님의 강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경전을 근거로 말씀하신 말법시대 가장 좋은 수행법은 아미타불 염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저 십념 염불만 해도 극락왕생을 보장하는 부처님의 자비공덕에 힘입어 모든 중생이 어렵지 않게 고난을 벗어나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무량공덕에 의지하여 염불만 하면 되니 얼마나 신묘한 일일까요? 또 현생에도 부처님의 가피가 흐르니 삶의 고난을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극락입니다. 이것은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에 힘입어 가능한 일입니다. 이게 제목 봉창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나무묘법연화경이 공왕불의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소개하신 염불법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동훈스님은 제가 알지 못하지만 말법의 시대에는 법화경에 의지하며 수행기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고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저로서는 없습니다. 법화경에 말세 말법시 후오백세에 법화경을 지니는 비구들을 수호하겠다든지 말세 말법시 후오백세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법화법문을 외우고자 21일을 경행한다면 자신의 몸을 보이겠다는 보현보살의 말이 나옵니다. 찾아보면 말법 시대의 법화경 수행을 언급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법화경 제목 봉창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아닐까요? 또 법화경을 설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는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장경에서 밝히셨듯이 미륵불이 오실 때까지 이 사바세계를 맡기신 대보살이 지장보살이라는 말 역시 믿어야 합니다.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고난에 빠진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소개하신 아미타불에 대해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법화경을 읽는다는 말씀이 참으로 반갑지만, 여전히 이리저리 짜깁기된 논리적 근거로 자신의 기도를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자꾸 자신의 자리를 중심으로 현상을 맞춰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냥 진리가 어디로 흘러가는가만 바라보고 따라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