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설하는 것, 전하는 것을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그럴까. 내가 읽고 있는 법화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법을 설하는 것, 전하는 것은 법을 듣고 받아지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법화경 희수공덕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일다여 여래가 멸도한 후에 비구든 비구니든 우바새든 우바이든 분별력이 성숙한 사람이든 동남이든 동녀든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문을 설하는 것을 듣고 기꺼이 받아 법회가 끝난 뒤에 일어나서 자신이 들었던 그대로 또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설법하려는 분명한 뜻을 지니고 정사든 집이든 숲이든 거리든 마을이든 고을이든 다른 곳으로 가서 자신의 역량껏 부모 종친 친우 친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거니와 또 이를 들은 사람이 다시 기꺼이 받아 다른 이에게 전하고......', '아일다여 전법하기를 거듭하여 쉰 번째에 이른 사람이......'
비구든 비구니든 우바새든 우바이든 분별력이 성숙한 사람이든 동남이든 동녀든(동남과 동녀는 분별력이 성숙하지 않은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이런 사람이 법화경의 법문을 설하는 것을 듣게 된다. 듣고 나서는 이것을 받아지니고 다른 이에게 설법(전법)을 하려는 분명한 뜻을 지니고 자신이 들었던 그대로 또는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 연설하는 것, 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확하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구절의 어디에도 근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얼마나 깨달음에 깊이가 있어야 하는지, 얼마나 수행을 많이 해야 이 법문을 설하고 전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단지 조건은 이 법문을 듣고 받아지니고 그것을 전하겠다는 뜻을 가지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있다고 본다. 즉 '이해하는 만큼 연설하는 것'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부처님이 전하신 법을 벗어난 엉뚱한 이해가 된다면 곤란해진다. 무엇이 바른 이해인가 알아차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가르침의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고 조화롭다면 타당한 이해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법화경의 내용을 들어 적어보았다. 어떤가. 여전히 법은 특별한 사람만이 설하고 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생각이며 누구의 주장인가. 이렇게 경전을 들어 이야기해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 어떻게 한낱 재가불자가 법을 말할 수 있냐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마음에 오랜시간 묶여있을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불자라면 자신이 아는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철저하게 따지는 것이 때때로 필요하다. 만약 사람의 말과 경전의 구절이 대치된다면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자신의 주장과 경전의 구절이 대치된다면 무엇을 고수하겠는가.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경전을 믿지 않는다면 경전 너머의 세계로 가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법을 말하는 나에게 '너는 법을 말할 수준이 아니다. 지금의 너를 참회하라'고 요구하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참회해야 하는가를 되묻고 싶었고, 정작 참회해야 하는 마음은 경전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전부라고 믿는 그 사람의 고정된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오랜시간 가치를 부여하던 것을 버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깨끗하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유익하다.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잘못된 이해와 믿음에 매여있다면? 글쎄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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