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보살행은 무엇일까.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6. 1. 12:04

예전에 어떤 신행이 지극한 스님의 이야기를 읽고 의구심이 들었었다. 스님 말인즉 누군가 어려움에 쳐했을 떼 그의 인과이므로 관여하지 않지만 그가 건질만하면 건진다고 했다. 많이 이상했다. 맞는 말이지만 마음에 일어나는 불편함은 왜일까. 스님이 어떠하다 말할 수 없지만 그 순간 그 분은 수행자이며 구도자일지언정 보살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들었었다.


인연에 따라 움직이고 인과에 따라 일어난다. 어찌보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산다. 맞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불자는 어떤 마음과 행이어야 할까,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지금도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장보살님의 행에서 불자가 가져야 할 마음과 행의 답을 찾았다. 물론 찾았다고 그대로 하지는 못한다. 택도 없다. 나 역시 불완전하고 미흡하다는 전제하에 적는 글이다.


지장보살님이 대원본존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 분의 깊고도 넓은 서원때문이다. 그렇게 굉장한 분이 여전히 보살행을 하고 있음을 본 사천왕이 부처님에게 그 연유를 물어본다. 그때 부처님은 "지장보살이 아득히 먼 옛겁부터 오늘에 이르기도록 중생들을 제도하였지만 아직까지 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거듭거듭 원을 세우고 있는 것은, 미래의 한량없는 겁까지 중생들의 업연이 이어져 죄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관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자비심으로 거듭거듭 원을 발하여 사바세계의 염부제 중생들에게 백천만억 방편을 베풀어 제도하는 것이니라." 라고 답하신다. 또 지장보살님이 중생을 건져 교화하는 모습에 대한 비유가 있으니 험한 길을 부축하여 건네주고 다시는 저런 길로 들어가면 안된다고 당부하신다. 즉 보살은 죄지어 고통받는 중생들이 악도를 벗어나 다시 그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주지만 중생은 다시 악도에 들어가는 일이 반복된다는 이야기이다.


보살행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대상에 대한 무량한 자비로 일어나 끊임없이 그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참다운 보살행이며 불자가 마음에 담아야 할 보살행이다. 다시 악도에 들 것을 알아도 오늘 만난 그를 건지며 좋은 길로 나아가라 알려주는 것이 보살행이다. 반복된다 할지라도 지치지 않고 마음에 일어나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이런 보살행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참으로 보살행을 하고 싶다면 몸을 자연히 움직이게 하는 자비에 물들어야 한다. 또 백천만억의 방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게 적합한 방법을 알아야 하니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을 대하여 불자들은 침묵함을 최고의 가치로 이야기한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일정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침묵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침묵을 깨뜨리고 나가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 보살행은 침묵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자각이 불러오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바탕되어야 하고 어떤 것이 유익함으로 이어질지를 알아차리는 지혜, 그 결정을 실천하는 힘, 능력으로 도움받아야 이룰 수 있다. 물론 원만하지 않으면 침묵이 나을 수 있다. 그래도 원만하지 않아 보살행을 실천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되어야 좋은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자각이 있는듯 없는듯하여 하는 말과 행동이 자비라 할 것과 상관없는 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미운 마음은 떠났으나 충분하지 않다. 뜻을 세운 보살행의 위기다. 당신은 어떤가.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자비에서 일어나기를,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지혜와 적절한 힘으로 도움받기를 기원한다. 지장보살님을 향해 '당신의 자비행을, 보살행을 따라 우리의 삶을 밝게 만들기를 원합니다.'라고 진심어린 발원하는 날 되었으면 한다. 글을 적으나 이상하게 떠있는 느낌이다. 내가 놓친 것을 찾아야겠다.


나무묘법연화경_()_  나무석가모니불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일체불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