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부처는 어디 있는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7. 11:28

불상에 예경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절은 앞에 있는 불상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

너무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이에게는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 안에만 부처가 있는듯이 말하면 그 또한 치우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는 내 안에 있는가. 내 밖에 있는가.

내 안에 있기도 하고 내 밖에 있기도 하다.

온 법계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 같은 불성이니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너무 하나에 치우치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실 나는 무식하여 불교의 교리를 잘 알지 못한다.

중도가 무엇을 말함인지 정확하게 꿰뚫지 못하지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한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가리는 것으로 닿을 수 없는 법의 본질을 부처님 가르침은 담고 있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그래서 때에 따라 이것이라 말해도 괜찮고 저것이라 말해도 괜찮은 법을 마주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 자체가 이미 본질을 벗어나니 치우친 자리를 떠난 중도는 불법을 논할 때 중요한 바탕이 된다.


가끔은 누군가와 법을 말할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잘못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장난이 되겠구나.

그런 말장난을 이어가는 것이 마치 불교를 잘 아는 사람들의 유희인양 떠들어대는 것이 별로 마땅치 않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간단하게 주고 받는 것으로 서로의 법을 이해하는 수행자의 이야기를 읽는다.

법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표현을 달리 해가면서 이러니 저러니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을 백가지로 하든 천가지로 하든 흐르는 본질이 하나임을 서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내 수레가 얼마나 비어 이리 요란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대는 어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