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불법, 구제할 것인가, 물리칠 것인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1. 13. 10:05

어제 불법이 퇴마가 아니라고 했다. 퇴마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존재와 현상에 대해 불자가 법으로 해나갈 수 있는 일, 두 가지 양상을 적어보려 한다.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을 취해 쓸지, 그 적절성이 달라지겠지만 그 마음에 무엇을 품고 나아가는 것이 더 불성에 가까운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염불가피록에서 읽었는데, 어떤 이가 전생에 너무 많은 생명을 죽여 현생의 삶에서 꿈과 현실이 구분 안되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전생의 습이 현생에도 드러나 가축 죽이는 것에 열광했고 언젠가부터는 무서운 존재들(원결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때 한 스님을 만나 염불기도에 전념했고 밤마다 자기 앞에 나타나는 그들에게 염불 공덕을 회향해줬는데, 원결들은 염불공덕을 받고서 사라졌다고 한다. 법화경 서품에 보면 불국토에서 수행하는 보살들의 모습을 게송으로 나타내는 구절 중 '다시 어떤 이들은 우거진 숲에 은거하며 몸에서 빛을 놓아 지옥 중생을 구제하고'라고 나온다. 지장경에 보면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하여 성불시키는 것으로 그 원을 삼는다.


자, 이제 다른 이야기다. 가피록에서 읽었는데 누군가를 죽이려던 귀신이 염불자의 방광으로 놀라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 글에서 읽길 다라니를 하니 악한 귀신이 범접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또 염불을 하니 무서워서 있지 못하겠다고 영가가 떠났다는 글도 읽었다.


두가지 양상이 무엇인지 보이는가. 하나는 불법으로 어둠에 빠진 이들을 구제한다. 다른 하나는 불법으로 어둠을 물리친다. 솔직히 무엇이 더 좋은가를 가리는 것은 옳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어찌보면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든 불자가 가져야 될 마음자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설령 그 모습이 물리치는 것으로 드러날지라도 마음은 구제함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끝없는 윤회의 고리 속에서 이제 악으로 드러난 존재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꺼려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마음이다. 그런데 불자라면 오늘을 만든 과거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를 하나의 시점을 기준으로 가리는 것은 불자로서 그리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또 내가 구제받아 이제 편안하듯 그런 불법의 평등과 자비를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도 본다.


무엇으로 드러나든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구제하고 싶은가. 물리치고 싶은가. 나는 어떨까. 구제했다면 기쁠 것 같다. 물리친 것이 된다면 능히 구제하지 못했음에 아쉽겠지만, 만난 인연에 기대어 그 앞날이 밝아지기를, 불법의 인연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마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불성은 구제함을 기뻐할까. 물리침을 기뻐할까.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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