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임을 자처하면서 여전히 불법 아닌 다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마음에 담고 싶지 않으나 가끔 만나지고 보여진다. 아니 가끔 만나지고 내가 본다. 그 사람을 보면서 늘 마음에 담았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딱 그 사람에 대한 글이라기보다 그 사람으로 비롯된 일반적 현상에 대한 개인의 의견이다.
첫째, 불교의 의미가 무엇에 있을까. 나의 행복에 있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 행복은 어떻게 올 수 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상황이 변화해서 올 수 있고, 마음이 변화해서 올 수 있다. 물론 양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필요하여 분리해보았다. 아무튼 부처님은 우리가 어떤 행복에 들기를 원할까. 두 가지 모두가 정답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가르침의 끝에서는 마음이 변화하여 어느 상황에서도 행복함에 드는 것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이견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들어있고 당신이 주장하는 행복은 어떤 것인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둘째, 불자는 점차 나로 인해 상황이 변해간다는 인식에 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바깥 부처에게 기도하여 상황이 변하는 것에 기뻐하거나 놀라지 않고 자신이 어떤 마음을 쓰고 어떤 행을 하는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내 우주는 나로 인해 움직인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불법이 참으로 불성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점차 바라는 마음에서 능히 베푸는 마음으로, 편안을 구하는 마음에서 편안을 주장하는 마음으로 변화하게 된다. 중생심이 불성의 지혜와 자비에 점차 물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부처되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적고 보니 어떤 뜻을 세우고 어떤 마음을 쓰는가가 우리의 경계를 말해주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도 같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셋째, 기도해서 좋은 일만 생겼다면 오히려 경계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마땅하다. 기도의 참된 가피는 외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좋은 일만 생겨 마음이 편해졌다. 그것으로 내 마음이 참으로 닦이는 바가 있을까. 오히려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바른 가르침을 통해 인과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반성하며 그 결과 온갖 선의 뜻을 마음에 담아 행해나가는 사람이야말로 내적인 변화를 이룰 기회를 만나게 된다. 단지 좋아서 좋은게 아니라 좋지 않은 것에서도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이루게 된다. 결국 인과의 이치에 따라 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이 견고하므로 외적인 변화로 인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된다. 따라서 기도해서 좋은 일만 생겼고 이치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 좋은 것에만 마음이 매인다면 오히려 마장이라고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기도를 주장하는 그 마음을 보라. 기도를 통해 바뀐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 바른 가르침을 따라 마음의 변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면, 단지 효과있다고 하여 기도를 한 결과로 편안함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단지 좋은 상황에 편안해졌고 그 편안을 주장하는 나약한 마음에 불과하지 않을까. 상황에 따라 기도의 시비를 가리는 마음에 불과하지 않을까. 만약 좋지 않은 일들로 삶이 채워지면 어떤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불성의 참다운 자비에 의지하여 발원한다. 기도의 참다운 가피에 우리가 들기를. 오늘은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불법을 마음에 담았다면 당연히 했을 말과 행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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