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법사공덕품에 뜻의 청정을 언급하면서 게송 하나에도 드러난 뜻, 숨은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럼 무엇이 먼저일까. 글자를 내 생각 섞지 말고 그대로 읽어 그 드러난 뜻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서방극락정토를 적으면서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상할 것이다. 잠시 적으려는 글이 그것과 비슷하다.
서방정토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토삼부경을 읽어서 그 가르침 그대로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아미타 부처님이 오랜 시절 수행을 통해 이룬 공덕으로 장엄한 그 세계가 어떠한지를 경전을 통해 만나는 것이 먼저다. 그 세계는 아름답다. 보배로 장엄하고 팔공덕수가 흐르고 새의 노랫소리가 법을 설하는 소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의 소리도 그러하다.
모든 이들이 부족함없이 최상의 환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다닐 수 있다. 여러 불국토로 나아가 공양하고 다시 극락정토로 돌아올 수 있다. 부처님의 48대원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특별한 원이 있는 보살이 아니라면 그 곳에 태어난 중생은 수명이 무한하여 성불의 순간까지 그 곳에서 즐거이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경전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서방극락정토다.
그 이면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말할 수 있다. 극락을 말하고 싶다면 일단 드러난 극락을 마음에 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다음인데 이것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치우치지 않는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모든 것이 공이다. 맞지 않은가. 그런데 그 공은 없는 것이 아니다. 굳이 없다고 표현하고 싶다면 있음을 안고 있는 없음이라 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은 없지만 허무하지 않다. 허무함을 안은 공은 불완전한 공일 가능성이 크다.
부처님이 장엄한 극락정토 역시 공을 바탕으로 한다. 없지만 여전히 있다. 없음을 부르짖으면서 서방극락정토를 말할 때 잘못하면 많이 어색해지며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있지도 않지만 있지 않음도 아니라는 말을 그대로 수용해야 공을 말할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고 하면서 극락을 말하고자 하면 공의 자리에 잘 자리하여 말해야 듣는 이들이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다.
먼저 경전에 드러나는 극락세계를 마음에 담아라. 그리고 모든 것이 공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극락을 이야기하면 된다. 만약 당신이 우리 극락갑시다 한다면 있지도 않고 있지 않음도 아닌 공의 양 측면 중 어떤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생각드는가. 상대가 공을 통찰하든 통찰하지 못하든 없음을 품은 있음의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말장난으로 흐를 수도 있고 조금 난해할 글이지만 적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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