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어떻게 보면 한국 불교가 무속(巫俗)인지 종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절에 다니고 불공을 한다면, 그것은 불공과는 역행(逆行)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남을 돕는 일이 불공이라고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인데, 그냥 돕는 것이 아닙니다.
저쪽 상대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남을 돕고 모시는 것이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남을 돕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도움도 있고, 정신적인 도움도 있고, 육체적인 도움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도 불공이고,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도 불공이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일도 불공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에 떠내려가는 벌레를 구해주는 것도 불공이 됩니다.
불공이란 인간끼리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자꾸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됩니다.
나를 해롭게 하고 원한이 맺힌 원수를 돕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를 해롭게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가장 존경하고 돕는 것이 참된 불공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설사 내 부모나 자식을 죽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와 같이 섬기라고 했습니다.
보통사람을 돕거나 존경하기는 쉽지만 원수를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비입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불공이고, 또한 불교의 근본사상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아니려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은 불공을 가르치는 곳이지 불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탁자에 앉아 있는 부처님만 부처고 밖에 있는 부처님은 부처 아니냐는 말입니다.
탁자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것을 가르쳐서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시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순전히 명 빌고, 복 빌고, 남이야 죽든 말든, 이리되면 부처님 말씀은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아침 불교카페에 잠시 가서 읽은 글입니다.
불교의 아쉬운 한 국면을 두고 던지신 선지식의 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절에서의 불공도 의미 있고 생활에서의 불공도 의미 있습니다.
절에서의 불공은 불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는 의미가 있고
그 힘으로 생활에서의 불공이 원만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은 스님이 말씀하신 삶 속에서의 참된 불공이 아닐까 싶네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요즘 저는 이 일이 너무 힘겹습니다.
그나마 머물러 있는 지점은 인과를 보는 것, 그것으로 나름 위안을 삼는 것 정도 같습니다.
표현하기도 부끄러운 너무 어린 일입니다.
돌아보면 후퇴한 듯도 하고 그 언저리에 머물러 서성거리는 것도 같고 그렇네요.
나에게 자비가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이 또 공부할 기회일 텐데 잘 넘어가도록 불보살의 이끄심을 청합니다.
만약 부처님이라면 어떠셨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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