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업은 사라지는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5. 11. 11:26

카페에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낙태영가를 천도하게 되면 업은 사라지는가.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악업을 저질렀는데 그 업에서 자유로워지는가를 묻는 것 아닐까 싶었다. 간단하게 답을 적었다.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정확한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내 생각을 적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잠깐 하려 한다.


업은 사라지는가. 사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불교의 시각에서는 업 자체가 있은 적이 없다고 함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아는 바를 입에 올린다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 수준,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있음에 묶여 있는 이가 머리로 아는 것을 어설프게 삶으로 끌어들이면 때에 따라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깨달았다고 하면서 막행막식하는 이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 수 있다. 진정 깨달은 이의 막행막식은 조화로우며 무해함을 넘어서 유익하겠지만, 깨달았다고 내세우는 어떤 이의 막행막식은 주변을 어지럽히고 스스로도 어지럽힐 뿐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시작이겠지만 그래서 불자는 늘 부처님의 지혜, 자비를 마음에 두어야 한다.


업은 사라지는가. 있음을 전제로, 아니 있음을 위주로 이야기해보자면 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 인한 장애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과학적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뱉은 말한마디도 결국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업과 업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지금 적는 글은 불자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이러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견이며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측면이 있는 의견이다. 악업을 지으면 악업의 과보가, 선업을 지으면 선업의 과보가 생긴다. 업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며 그 중 악업은 여러가지 장애를 일으킴으로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기도를 하는 등의 선업은 이런 업의 장애를 벗어나게 한다. 물론 얼마나 벗어나게 하는지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겪어나가야 하는 장애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더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이다.


영가를 천도하면 낙태의 업은 사라지는가. 그 업은 남는다. 하지만 낙태를 함으로 삶을 고단하게 하는 장애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다. 기도를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다보면 정말 인간의 몸을 받아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마음이 닿게 된다. 만약 낙태를 했다면 감당하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 두려움마저 느낄 것이다. 그런 이는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런 인연, 생명의 귀중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태어나지 못한 인연이 기도의 공덕으로 부처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곳으로 나아가기 바랄 것이다. 그런 이는 낙태의 악업으로 인해 내가 좋지 않은 장애에 휩싸인다고 해도 그대로 수용할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런 이에게 장애가 장애로서 작용할까. 모든 기도가, 모든 악업에 대한 참회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기도자, 참회자는 이미 장애를 벗어난 이가 된다. 실제 장애가 작게 넘어가지기도 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장애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악업은 사라지는가. 업은 남아도 장애를 벗어나게 된다. 그 묘미가 불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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