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무식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한번쯤은 적어도 되지 싶기도 하고 오늘은 적고 싶은 마음이라서 적어본다. 바르지 않은 생각이라면 빠른 시간 안에 바른 것으로 돌이켜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리라 발원하며 글을 적는다. 그런데 별로 그른 것 같지는 않다.
경전을 읽다보면 여자의 몸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인듯이, 남자의 몸을 받는 것이 복받은 일인듯이 표현된다. 부처님 재세시에도 여인은 출가승으로 받지 않으려고 했고 법화경에도 보면 용녀에게 여인의 몸으로는 5가지가 될 수 없다고 이르는 어떤 보살의 말이 나온다. 그게 그냥 평범하게 볼 때 불교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인연맺은 종단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법회에서도 남여의 자리를 가르고 방석을 구분하는 등 남여의 분별(?)이 엄격한 편인 것 같다. 새해인지 무슨 날이 되면 어느 시간을 정해 여자신도의 사찰 출입을 금한다는 메세지를 보낸다. 또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신행단체가 아니면 가급적 남자를 장으로 하는 것 같다. 경험이나 다른 변수를 고려하기보다는 남성인가 여성인가가 큰 기준이 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오늘 나는 부처님 재세시의 일이 있어도, 용녀의 이야기가 있어도 분별을 떠난 시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법화경에서 여인이 과연 성불하겠는가 라는 기존의 시각에 대해 용녀는 시각을 깨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새 용녀는 보살이 되고 무상정등각에 이르러 설법을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큰 성불에 대해 남여의 제한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 법화경에 이르길 '여자다, 남자다'라는 분별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분별 자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예로 나온 것이 여자, 남자이니 아무튼 여자이고 남자라는 분별에 머무르는 것이 지향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인간으로의 탄생을 업생과 원생으로 나눌 때 업생이라면 매이는 것이지만, 원생이라면 어떤 선택도 가능한데 자신이 정한 것에 의해 태어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그런 이라면 남녀의 한계는 그를 가두는 족쇄가 될 수 없다. 나는 업생인가, 원생인가. 나도 모르지만 업생이라고 해도 그 업을 뛰어넘을 것이며 원생이라면 당연히 자유로울 것이다. 여인은 하천한가.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새로이 태어난 나는 위에 적은 이유들로 인해서 남녀의 분별을 뛰어넘는 존귀함을 가진 자로 스스로를 바라본다. 나는 존귀한 이며 지금 여인의 몸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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