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 외의 것을 잡행이라 표현하는 글을 종종 봅니다. 개인적으로 좀 이상하다할지 그렇습니다. 정토삼부경을 많이 읽지 않은터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산만한 글이 될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배우려 합니다. 한번에 끝날 고민이 아니지만 중요한 염불이니만큼 두고 두고 사유할 일이 될 것 같습니다.
1. 무량수경에 자씨 보살이 태생과 화생에 대해 묻는 글이 있습니다. 왜 누군가는 태생을 하고 누군가는 화생을 하는가를 묻지요. 일단 태생이든 화생이든 극락왕생이며, 다만 그 모습이 다릅니다. 이견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차이가 오는 것인가, 경에 말하길 어떤 중생들은 의혹심을 품은 채 모든 공덕을 닦아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태생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확신하지 않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지혜를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경에 말하길 어떤 중생들은 부처님의 지혜, 최상승지를 분명히 믿고, 여러가지 공덕을 지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신심을 회향하여 칠보로 된 연꽃 속에 화생한다고 했습니다.
태생하는 이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지 않고 공덕을 닦아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한 자입니다. 극락에 태어나지만 오백세 동안 부처님을 뵐 수 없는 곳에서 지내기에 다른 즐거움이 있어도 이것이 큰 괴로움이 되므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 것이 극락에서 가장 좋은 것, 다시 말해 부처님을 친견하고 공양하고 선을 닦을 수 있는 곳으로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지혜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 공덕을 닦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의미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이해됩니다. 맞지 않나요?
화생하는 이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여러가지 공덕을 지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신심을 회향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을 믿는 것과 공덕을 지어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신심을 회향하는 것이 화생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칠보로 된 연꽃 속에 화생하면 부처님을 친견하고 공양하고 선을 닦을 수 있으니 중생의 큰 기쁨이 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공덕을 짓는 일이 잡행이며 부처님의 본의가 아니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공덕을 짓는 일은 불지혜를 믿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잡행이라 하면서 경시할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이해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부처님 지혜를 믿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지, 공덕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관무량수경의 삼배구품왕생에서 상품상생과 하품하생의 내용을 보려 합니다. 극락에는 총 9가지 왕생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상위인 상품상생은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요?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중생이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 깊이 믿는 마음, 회향하여 발원하는 마음의 세 마음을 내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또 자비심으로 살생하지 않고 모든 계행을 구족하여 지키는 자, 대승인 방등경전을 독송하는 자, 육념을 수행하고 그 공덕으로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고자 회향 발원하는 자가 태어납니다. 이들은 왕생하면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을 얻게 되고 잠시동안 두루 시방세계를 돌며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수기를 받은 뒤 극락세계로 돌아와 무량한 다라니문을 얻게 됩니다. 하품하생은 어떤 이들이 갈까요? 온갖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한 이가 죽는 순간 선지식을 만나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여 10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하품하생으로 태어납니다. 12대겁이 지나야 이 사람이 자리한 연꽃이 피어나고 관세음, 대세지 보살님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보리심을 발하게 됩니다.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마치 화생과 태생처럼 그 모습이 극명하게 다릅니다.
선하지 않은 행위로 살아온 사람도 죽음의 순간 10념의 염불로 극락왕생을 합니다. 믿고 부르는 것은 극락왕생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48대원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가 맞이하는 극락왕생의 모습은 다릅니다. 말하자면 그 극락왕생에서 맞이하는 곳이 어떠할지, 어떤 모습일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위의 글들이 염불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하열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말한 방편설 정도로 이해되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48대원을 중심으로 극락왕생의 모습을 더 상세히 전해주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믿고 불러야 합니다. 믿고 부르면 극락왕생은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상의 것을 만나고자 한다면 믿고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른 행을 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해되네요.
3. 아미타경에서 육방불의 증명에 대해 나옵니다. 육방불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이 경을 믿어라.' 이 말은 아미타경을 믿으라는 것이지, 다른 것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염불의 공덕을 인정하는 것이지, 염불하지 않은 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매우 다른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이것 아닌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데 부처님 믿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 좋은 일, 바른 일이지만, 그것이 곧 여러가지 공덕을 쌓는 일을 잡행이라 명명하여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전을 잘 읽어보면 그런 의미, 그런 결이 아니라고 이해되는데 글쎄요. 염불을 강조하고 귀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잡행이라 하면서 여러가지 공덕 쌓는 일을 경시하는 마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본원에 합하는 일이며 진정 부처님이 기뻐할 일일까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토삼부경을 읽은 저는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원력을 믿고 의지하라(믿고 부르라).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가지 공덕을 쌓아나가라. 그것이 참으로 복되다. 생각해보세요. 염불하면 불성으로 가득해질텐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온갖 선행과 지혜의 일들마저 잡행이라 부르며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된다면 부처님은 참으로 당신 뜻을 잘 이어받았다고 기뻐하실지. 또 모든 부처님의 뜻은 결국 우리가 부처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 이르는 온갖 일들을 기뻐하지 않을 부처님은 없을 것입니다. 독경을 위시한 모든 선행이, 수행이 그 길을 돕는데 아미타부처님을 믿고 부르는 이가 그러하다면 과연 부처님은 나의 본원이 아니다 하실까요? 더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이름만 믿고 불러도 극락왕생이 정해지는데 거기에 더해 너는 온갖 부처님의 선한 가르침을 따라 정진하였으니 그 일이 참 귀하다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48대원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습니다. 그런 저는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온갖 선행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과연 부처님일까? 그런 부처님이라면 내가 아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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