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오랜만에 홍익학당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6. 23. 07:50

어제 늦은 산책을 하다가 유튜브 홍익학당 강의를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있는 간식을 생각하는 아이같은 그런 심정이었는데, 집에 들어와서는 뭐가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했다. 잠시 그러다가 강의를 떠올렸고 최신 강의를 검색했다.


3분 강의 하나, 화엄경에 대한 강의 하나를 봤다. 욕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솔직히 나는 윤홍식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즐거울 때가 꽤 있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교 공부를 하거나 수행하면서 참고할 지점이 있었다. 배우기도 했고 내가 경험한 것이 그것이구나 알아차리는 기회도 됐었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무엇에도 비교못할 즐거운 일이다. 전에는 직접 강의를 들으러 가볼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잔을 기울이며 도를 말하고 수행을 말하고 싶기도 했다.


하나 아쉬운 것은 법화경을 부처님 최고, 최후의 가르침으로 아는 나,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절대적으로 믿는 나(물론 48대원을 다 외우지도 못하고 마음에 담지도 못하지만 그것을 믿는다)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그의 논리가 아쉽기도 하고 '어, 저건 아니잖아.'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살이 좋지만 불교에 정통한다면 부처의 의미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미 여러차례 말했지만 모든 보살이 보살의 행을 하더라도 그 마음에 부처의 원을 담지 않는 보살은 없다. 지장보살이 위대한 것은 부처로 나아가는 길에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겠다는 원을 조건으로 달기 때문이다. 부처되는 일이 최상의 의미가 아니었다면 그 원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게 상식이라 생각한다.


아미타부처님은 믿고 이름부르는 이에게 극락정토의 왕생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 목적은 극락왕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극락에서 수행하여 모든 중생이 성불에 이르게 하는 것에 있다. 모든 부처님의 원이 그러하다. 그것을 위해 나왔다고 법화경은 전한다.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바탕되지 않으면 엉뚱한 이야기, 해설이 되어버린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나는 밝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홍익학당 강의에서 기쁨을 느끼지만 그래서 그 강의에 온전히 동의하고 웃기는 어렵다. 아무튼 즐거움이 있는 강의였다. 그의 통찰은 즐거운 점, 배울 점, 참고할 점이 있어서 좋다. 그래도 내가 알고 보는 이것을 그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게 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