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카페에서 글들을 쭉 둘러보니 한 아는 이의 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댓글, 답글 하는 제목을 보니 여전히 자신을 주장하면서 동조하지 않는 이를 비난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사나 보다 싶었다.
어떤이와 나눈 댓글을 올린다는 글을 보니 살짝 책임감을 느꼈다. 예전에 다른 카페에서 내 글에 좋지 않은 댓글들을 달아서 고민하다가 글을 완전히 삭제한 적이 두어 차례 있었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오물이나 무거운 짐을 주렁 주렁 단 듯한 심정이었다. 마음에 안들면 읽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이런 저런 욕을 하고 트집을 잡아대며 댓글을 달아대니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뜨면 심장이 쿵쿵거리는 그런 증상도 생겼었다.
그때 글을 날리니 이런 방법은 자신이 생각을 못했네 하며 비아냥거리기에 그 댓글들을 본글로 올려줬다. 스스로 놀랐다. 그 글을 복사해뒀다. 트집을 잡으면 다시 올려주고 말지,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오늘 보니 댓글들을 본글로 올린 것 같아 그 댓글 쓴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내가 한 방법으로 누군가가 곤란함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내글에 달리는 그의 댓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시 대화라면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가 뜻을 가운데 두고 소통해야 하는데 댓글을 통해 대화를 해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나의 글에 대해 이것을 트집잡아 거기에 대한 답을 하면 생뚱맞게 다른 말을 꺼낸다. 그의 말에 대해 경전을 기초로 내가 이해한 바를 말하면 여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면서 다른 트집을 잡는다. 글을 흐르는 것은 반감, 비난, 인신공격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경전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진정 법화행자라면 법화경을 소중히 배워가는 사람에게 저렇게 악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으면 법화경을 제대로 배우는 수준도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여래가 아니면 중생의 경지를 누구도 밝게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 수준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게 맞는지 정말 궁금하고 답답할 때가 많았다. 분노같은 악심이 마음을 흐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도적인 무시의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내 말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초보불자다. 한자만 적어대는 글은 찾아봐야 한다. 가끔 누군가가 내 글에 한문 댓글을 달면 반이상은 찾아봐야 한다. 잘모른다. 체계적이고 유식한 공부자의 해설과는 거리가 멀다. 번역본을 읽을 뿐 글을 분석하며 스스로 번역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괜찮지 않은가? 누군가는 번역을 하고 나는 읽는다. 번역이 부족하면 또 다른 번역으로 연결된다. 글자가 아닌 살아있는 가르침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법을 배우면서 불성의 이끄심을 느낀 적이 없는가? 바른 수행이라면 법계는 나를 방치하지 않는다. 그런 자의 수행이 견고해짐을 온 법계가 즐거워한다.
그리고 내가 유식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체급(싸움을 즐기는 자의 표현같다. 체급)이 아니라고 해서 부처에서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불성이 그런 것이니까. 체급이 중요한가? 누가 말하는 누구의 체급인가? 사람들이 다 하찮게 여겨도 불성에 비추어 바르다면 법계가 기뻐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체급 혼자서 다 섭렵하길. 관심사가 아니다. 자신의 관심사가 다른 이의 관심사라고 생각하면 착각일 수 있다.
늘 그런식의 댓글을 달았고 크게 취할 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예전 글에 달린 답글도 읽지 않았는데 오늘 앞부분을 조금 보니 체급을 언급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답변도 못하는 체급이라고 말해서 마음이 상했냐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자신만이 바르게 안다고 주장하는 그의 말이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법화경을 진심으로 받아지닌다면 저런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법화경에서 법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비롭기를 당부하신 부처님의 절절한 마음에 닿았다면 저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이들을 비난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최선에 대해서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지금 할 수 있는 허락된 최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지난 늦여름 이 사람으로 인해서 문득 들었었다. 가끔 자신은 너무도 당연하게 아는 그것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각해보라.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시력을 예로 들어 보면 1.0의 시력인 사람은 1.0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다. 0.1의 시력인 사람은 마찬가지로 0.1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다. 1.0은 0.1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기준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그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0.1은 1.0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불자의 수행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법화경을 이제 3년째 읽고 있는데 수도 없이 읽은 구절이 이제 들어오는 경험을 근래에 했다. 읽었는데 숨은 속뜻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제야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 3독을 그런 경험으로 보냈다. 너무 신기한 경험이다. 그때 통감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제야 비로소 글자를 글자 글대로 읽을 근기가 되었나 보다였다. 늘 겸손함을 추구했다고 믿어왔는데, 사실은 스스로 착각 속에 견고하게 빠져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을 꼬박 읽어 이제 글자를 글자 그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한달도 전에 법사공덕품의 글을 인용하며 드러난 뜻, 숨은 뜻을 말하고 드러난 뜻조차 알지 못하는데 숨은 뜻을 어찌 알까를 호기롭게 주장했는데, 내가 그 드러난 뜻에도 제대로 닿아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부끄러운 일인가?
진리는 하나이나 받아들이는 우리가 다르다. 법화경의 초목품처럼. 지금 하는 독경이 나에게 허락된 이해의 최고이듯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무엇이 더 높고 낮은지는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말자. 그저 다른 이들이 내가 바라보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을 나처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을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인정을 바탕으로 자신이 아는 법을 말하고 나와 다르게 말하는 이의 법을 사유하고 취할 점을 취하면 될 뿐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삶을 움직이는 진리로서 마주하고 싶다면 머리로만 분석하려는 모습을 떠날 필요가 있다. 10년을 법화경을 읽으며 연구했다는 사람과 말을 섞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지금 보는 이것을 저 사람은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란한 지식을 말하며 이슈를 몰고 오는 화제의 인물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법을 배우고 법을 알려 나의 삶을 밝히고 사람들의 삶을 밝히고 싶다는 마음이라면 머리로 법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부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을 열고 새로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면서 중생을 비난함에 물들어있다면 그것이 어떤 자비란 말인가? 이상한 자비, 불완전한 자비다. 부처님이 말하는 자비는 아니다.
많이 알지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지금 아는 불성으로 생각하건대 누군가 깨달았다고 하는데 자비가 흐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깨침이 어리다고 할 것이다. 충분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자비가 흐르지 않는다면 부처에 가까울지라도 단연코 멀다고 할 것이다.
법화행자라고 스스로를 내세우지만 그 말과 마음씀에 자비가 흐르지 않는다면 아직 부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다고 할 것이다. 잘못된 법, 그것을 말하는 자를 비난하라는 권유, 그 비슷한 가르침도 나는 법화경에서 읽은 바가 없다. 친근할 바와 멀리할 바가 있을 뿐이다. 법사는 오로지 자비, 인욕, 공의 자리에서 법을 설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는가? 이해 못할 사람이 있는가? 힘들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그의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러니 시간을 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생각에 닿고서야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게 그의 최선일테니 이해해야 하지 않겠냐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누군가도 나에 대해 이리 생각하면 된다. 이게 나의 최선이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낙담하지 말고 안심하라. 이게 끝이 아니니 더 나은 경지로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최선의 수준은 바뀔 수 있다. 지금 어떤 원을 세우고 어떤 행을 쌓아나가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을 안다면 미래의 수준이 어떠할지 능히 예측할 수 있다. 지금 그대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은 어떠하며 그래서 내일은 어떠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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