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이 믿던 논리와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혼란스러워진다.
불자라면 대부분 인과를 말하고 윤회를 말하며 전생을 말한다. 그런데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다른 말을 들으면 많이 고민이 될 것 같다. 지금 나로서는 어떨까. 사람들에게 윤회, 인과를 강조하며 글을 쓰고 이야기하지만, 누군가가 정색하며 묻는다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스님의 법문처럼 윤회라는 용어와 개념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아닌 인도의 당시 개념이 가미된 것이라 하더라도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르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 초기불교의 가르침인가, 아닌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법화경을 읽은지 4년이 되고 있다. 읽으면서 이것인가, 저것인가에 대해 시비하는 마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내가 이해하는 바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의 본모습과 얼마나 가까운지 모르지만, 지금 닿아있고 이해하는 불법으로는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부처님 법을 배워나가는 길에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단지, 윤회가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을 뛰어넘고 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가 아직 되지 못했기에 머리로 아는 수준에 불과할 뿐이고, 또 윤회가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현상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청정함으로 나아가는 길에 힘이 되어주니 굳이 윤회없다는 것에 중점을 둘 필요가 없을 뿐이다. 중도를 이런 것에 끌어다 놓으면 마땅치 않겠지만 한 쪽으로만 편향되어 집착함이 없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실체를 알아차리고 때에 따라 가져다가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이 중도에서 멀지 않다고 본다.
법화경 초목품의 구절이다.
그리하여 중생은 무명으로 인하여 눈멀어 윤회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건만 이미 삼계를 여읜 여래는 소중한 외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처럼 중생을 불쌍히 여겨 삼계에 출현하거니와 또 지혜의 눈으로써 중생이 윤회의 바퀴를 굴리면서도 스스로 윤회에서 헤어날 정도를 찾지 않고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나서 여래는 곧 이렇게 결심하되, 저 중생은 저마다 선세에 행한 선업에 따라 탐욕은 강하나 진에가 약하기도 하고 또 탐욕은 약하나 진에가 강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지혜가 없고 어떤 이들은 총명하며 또 어떤 이들은 성숙한 정견을 지니고 다른 이들은 사견을 지니기도 하나니 저들 모두에게 여래가 방편으로 삼승을 보여야겠노라 하느니라.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명으로 인해 윤회에 빠져있다. 무명을 벗어난다면 더 이상 윤회에 머무르지 않는다. 윤회는 있는가? 있다. 무명에 빠진 이에게 윤회가 실재한다. 하지만 무명을 벗어난 이에게 윤회는 있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라.
법화경 안락행품의 구절이다.
또 문수사리여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을 공이라 관하느니라. 일체법은 실로 그러하기에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나니 그러한 까닭에 일체법은 성품이 허공과 같아 평범한 언사나 필설로 밝히지 못하고 또한 나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며 유위면서 무위요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지만 있지 않음도 아니기에 말로 드러내지 못하며 어디에도 매인 바 없고 실재하지 않건만 마음이 전도된 탓에 스스로 그렇게 드러날 뿐이니라.
유위는 인연에 따라 발생·형성되는 모든 현상, 즉 원인과 조건과의 결합을 통하여 현실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말한다고 하고, 무위는 여러가지 원인, 인연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고 한다. 일체법이 공하기에 유위면서 무위라고 했다. 즉 인연을 따라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연에 의해 발생되지 않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연을 따라 발생함을 주장하는 것은 윤회, 전생, 인과를 인정함과 멀지 않고 인연에 의해 발생하지 않음을 주장함은 윤회, 전생,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멀지 않다.
부처님은 무명으로 일어난 모든 현상을 그저 무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그 안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빠져있는 현실을 바탕삼은 위에서 각자에게 알맞은 법을 말하여 차츰 무명을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 부처님같은 지혜를 갖추게 되면 일체법이 공한 경지를 알게 되는 것이며 힘을 갖추게 되면 그 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쉽게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예를 덜어 허공에 양 한마리를 그려보겠다. 양이 있는가? 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쓰면서도 딱 맞는 충분한 예가 되지 않는다 생각들지만 대략 그렇게 이야기를 진행해보면 양을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인과가 되고 인연이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양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에 빠져있는 우리 마음에 양은 실재하지만 사실 없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부처님은 이 그려진 양에 대한 중생의 마음을 존중하신다. 그리고 허공에 양을 그렸을 뿐임을 알아차리기를 바라며 각자에게 마음에 닿을 이야기로 시작하여 우리를 가르치신다.
불법을 배우는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법은 어느 지점일까? 다 다를 것이다. 들어서 이해하는 그 지점이 부처님이 나를 가르치시는 지점이다.
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누군가 다른 말을 한다고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간을 두고 공부하다 보면 지금은 너무 이상한 이야기가 점차 마음에 닿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법을 바르게 받아지니고 그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의 이야기에 한한다고 말하고 싶다. 삿된 법이라면 굳이 마음에 담아 고민할 필요가 무에 있을 것이며(물론 바르게 알아가는 길에 참고가 될 수 있지만 불필요하게 마음을 흐릴 수 있기에 오래 머물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법을 배우려는 불자가 멀리해야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법을 공부할 때에는 경전을 읽으면서 필요하다면 선지식의 가르침을 찾아 참고하고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가고 싶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혼자서 잘못된 길로 들어갈 순간에 선지식의 가르침이 나를 잡아 이끌기도 하고 삿된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의 가르침에 빠져들 순간에 내가 배우고 공부하는 법이 찜찜한 느낌을 주며 그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막아서기도 한다.
너무 아쉽다. 내가 더 명확히 안다면 누구나 읽어서 밝아질 글을 이해하기 쉽게 적고 싶은데 뜻은 그러해도 아는 것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라. 공부 더 되고 스스로 밝아지면 또 적을 날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늘 그렇지만 이것은 내가 지금 이해하는 바일 뿐이다. 그러니 읽고 그럴수도 있는가라고 생각하면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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