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말을 섞기 어려운 때가 있다. 이야기하는 바탕(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으면 이해하기 편할 것 같다. 만약 음식의 의미를 새겨 나의 하루 에너지가 되어주는 음식물에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식사를 하는 이에게, 어차피 음식은 맛있는 것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음식에 대해 논하고자 하면 교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만약 그저 할 수 있어서 사찰의 일(봉사)를 하는 것에 기쁨과 의미를 두는 이에게, 공덕을 지어 개인복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가 봉사에 대해 논하고자 하면 이 또한 교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불교, 기도도 그러하여 만약 누군가 기도의 의미를 내 업장 소멸해서 현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 따라 자신에게 적절한 기도를 찾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전적으로 동조할 수 없다. 우리의 출발선이 다르다. 나 역시 그 입장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 그것으로 시작했을지라도 지금은 다른 선에 서있다. 가르침이 그렇게 이끌어간다. 아마도 변화하는 근기에 맞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근기따라 인연따라 간다. 비교하여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근기, 그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뜻과 원, 행하는 업이 앞날을 결정한다는 이야기이다.
중생근기가 다를 뿐, 모든 수행법이 다르지 않아 근기따라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불도를 구함을 법화경 여러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다양한 수행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법화경인데 다른 말을 하면 될까. 내면에서 울리는 불성의 소리는, 만약 그것이 불성의 소리가 정말 맞다면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의 최선이지 다른 이의 최선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소화할 기능이 있어야 효과가 있으니, 욕심에 눈이 가려서 구한 기도가 아니라면 당신이 소화할 수 있는 기도, 지금 당신 근기에 합당한 기도라는 이야기이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의 수행도 그러하다. 출발선이 그러하고 기도가 그러한데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그 무엇이 됐을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주장이라면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아무리 이리 저리 가려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건물처럼 위태로울 뿐이다. 내가 적는 글들은 요즘 하나로 귀결된다. 바른 가르침. 그것이 나의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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