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모카페에 들어 읽은 글이 편하다. 묘공대행선사의 글이라는데 잘은 모르지만 참 좋다. 옮겨 적어 나누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오로지 자성(自性)을 스승으로 삼아라
자성이 있음으로 해서 일체만법이 돌아가니, 마음의 기둥인 자성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밖에서 찾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 공부는 자기가 가르치고 자기가 배우는 것이다.
자기가 놓고 자기가 받으며, 자기가 항복하고 자기가 항복을 받는다.
마음을 닦는 것은 이와 같이 결국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일인 것이다.
그러니 밖에서 찾지 말고 밖으로 끄달리지 말라.
허공을 쳐다보며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한들 백년 천년이 가도 소용이 없다.
이름을 부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 보아도 그것은 헛일에 불과하다.
신은 내 안에 있으니 밖으로 청해 보았자 대답이 있을 리 없다.
내면의 불을 켜지 않는다면 제대로 보지 못해, 모든 일이 천방지축이 될 뿐이다.
하느님,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밖에서 찾는다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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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조건만 맞으면 절로 피어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꽃나무를 잘 살피어 꽃이 피어날 수 있게 노력하기보다는 어디 눈이 번쩍 뜨일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가 싶어 밖으로 찾아 헤맨다.
하지만 내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특별한 방법을 찾을 순 없다.
먼저, 마음으로 중심을 세우고 밖으로 도는 생각을 안으로 돌리도록 하라.
다른 사람의 깨달음에 황홀하여 달려가지 말고, 내안에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나도록 하라.
모든 것은 이미 내 안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절로 피어나도록 도와주기만 하라.
# 묘공대행선사
선사의 글에 동감하나 그에 덧붙여 적고픈 것이 있다. 걷지도 못하는 이에게 날라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걷지 못하는 우리는 날개 있어 날아가는 누군가를 의지하여 점차 걷는다는 기쁨을 알게 된다. 걷는 자는 그것으로 족한 것일까. 날아가는 자는 우리에게 '너도 숨겨진 날개 있음을 알라' 한다. 날개 있는 우리는 그 날개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펼쳐 나는 것을 익혀야 한다. 그리하여 날아가는 우리는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며, 날아가는 기쁨으로 서로 미소짓게 된다.
그것을 근기라 하고 그것을 방편이라 할지 모르겠다. 경전에 수없이 적힌 바 있다. 걷지 못하는 이가 날아갈 힘을 갖추게 하는 것이 이 근기따른 방편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것이 당연한 목적이라고 해도 걷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걷는 것에 고정되고 그것에서 멈추지 않게 해야 한다. 자성에 눈뜨게 되면 날개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과 같아진다. 자성에 눈떠도 바깥 것에서만 헤매는 이는 날개 있음을 알고도 걷는 일에만 신경쓰는 것과 같아서 참으로 좋은 것을 얻기 어려워진다.
비유가 괜찮은지 모르겠다. 아무튼 밖의 부처를 진심으로 대하면 내 안의 부처를 알게 된다. 내 안의 부처를 알지 못하면 천년 만년이 지나도 중생일 뿐이니 어느 세월에 성불하겠는가. 적고보니 너무 나간 것도 같으나 내 생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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