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견성이 곧 부처는 아니다. 성불에 얼마나 걸릴까.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3. 4. 10:44

누군가 성불의 기간을 적은 글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애초 글쓴이는 왕생하면 성불이 빠르니 염불하여 왕생하자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교하여 적은 글이 그리 밝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 글도 댓글도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각자 자신이 아는 바를 주장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글을 적는 것도 어찌보면 내가 아는 바를 주장함이니 나 역시 같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글을 읽고 일어나는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염불하여 왕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더 이상 괴로움 속에서 윤회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불세계에서 수행하고 궁극에는 성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괴로움을 벗어나듯 다른 이도 괴로움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함께 아미타부처님을 믿고 불러 왕생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사실 성불이 빠른지 느린지 그것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또 경을 많이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이 빠른지, 빠르다면 얼마나 빠른지도 모르겠다. 다만 수행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니 빠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성불에 뜻을 둔 우리 각자 각자에게 얼마나 의미있는가와 성불의 기간을 언급함이 경전을 들어 바르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것 아닐까. 불성을 지닌 각자의 뜻이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자고 주장할 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됐어요. 이 가장 비참한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머물겠습니다. 떠난다면 다시 이 곳으로 와서 또 이들과 함께 하며 삶을 밝히겠습니다.'


누군가 댓글에 말하길 타고난 성품을 밝히면 깨달음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즉 견성하면 성불이라는 말을 하는 것인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성품을 보았다고 그가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수준에 바로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참선을 통해서 견성했다고 그가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은 거칠게 표현하면 내 안에 불성 있으니 내가 곧 부처라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곧 부처는 아니다. 부처님을 양족존이라고 하는 의미를 잘 새기면 답이 나온다고 본다. 법화경 대통지승여래 나온 부분을 읽어보면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대통지승여래께서 도량에 앉아 일체법의 진실상을 보셨건만 십 중겁에 이르도록 정각을 얻지 못하시매 ...... 그러나 그대들이 일체지자의 지혜와 승자들만의 십력을 성취하게 되면 비로소 삼심이상을 갖춘 부처가 되리니' 지혜와 복덕을 원만하게 갖추어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 


예전에 읽어 마음에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면 그곳에서 수행하여 성불한다. 더 이상 윤회의 고통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한 생에 성불한다는 말은 맞다. 다만 얼마나 수행해야 부처되는지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는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 국토의 중생 수명이 무량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 이렇게 볼 수 있다. '그 무량한 수명 가운데 수행하고 지혜와 복덕이 충분하여 부처될 만한 때가 되어야 부처된다.' 예전에 읽고 요즘 아주 조금 읽은 나의 기억이 경전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인생걸고 염불 할 생각이면 이 염불에 대해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경전을 직접 읽어 확인해보면 좋겠다. 답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염불에 대한 누군가의 말이 자신의 이해를 거스른다고 생각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시간내어 경전을 읽어보면 좋겠다. 


제목을 적고 보니 성불에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하여 읽은 이에게는 직접적이고 시원한 답을 하는 글이 아니라 애매하기는 하다. 분명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같은 부처되는 것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불에 얼마나 걸리는지를 가지고 이 수행을 할지 저 수행을 할지 결정하는 것보다는 어떤 뜻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가기 바라는가를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인과를 받아들이는 불자라면 내가 지어온 업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온전한 수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악행을 일삼았는데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보면 탐진치에 가깝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나를 위해 오랜 시간 공덕을 지어 편안한 수행의 길을 열어놓으신 부처님의 자비에 마음 닿게 되면 감사하고 부끄러우니 비로소 탐진치를 떠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바르게 법을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법을 말하고 싶고 말하기 위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뜻을 세우고 노력한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을 알리면 좋겠다. 불안함을 편안함으로, 고통을 안락으로 이끌기 위해 부처님 법을 말할 때는 자비를 담고 지혜를 써서 온전히 선을 이루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