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수행을 주장하며 아미타불의 염불수행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미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1.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서로 상반되는 듯한 왕생에 대한 글, 2. 말세에 대한 이해와 무량수경에서 경전을 언제까지 머물게 하겠다는 글이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정토삼부경에서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에 대해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서의 언급이 상이한 것은 사실이다. 무량수경에서는 48대원 중 18원인 십념왕생을 말할 때 오역죄를 범한 자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는 말을 붙이고 있다.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정토 관하는 공덕을 설하면서 삼배구품왕생 중 하품의 극락을 관하는 부분에서 오역죄를 지은 이도 죽음을 맞이하여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한다고 적고 있다. 그 표현을 경전 그대로 적어보면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여 구족하게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80억 겁의 생사의 죄가 소멸되느니라. 그리고 그 사람의 목숨이 마칠 때에 마치 태양과 같은 금색 연꽃이 그 사람 앞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되고, 일념 사이에 바로 극락세계의 연꽃 속에 왕생하게 되느니라.'이다.
왜 법장비구는 십념왕생의 원을 세울 때 오역죄 짓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고 했을까? 그 의미가 무엇이며 정말 그런 죄를 지은 자는 극락왕생의 희망이 없는 것인지, 두 경전에서의 십념왕생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사실 잘모르겠다. 아직 정토삼부경을 많이 읽어 이해가 깊지 않기 때문에 지금 어떤 의견을 적는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면서 억지로 쥐어짜는 것, 즉 억지나 내 마음대로의 추측이 될 뿐이라 생각한다. 부처님을 믿고 찬탄하며 나 역시 죽어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있다. 기억에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적은 없는 듯 하나, 실제 그러한지 모를 일이고 만약 내가 그런 죄를 지은 자라면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이 불가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염불하는 불자로서 그 부분을 밝게 알았으면 좋겠다는 원이 생겼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지금 법화경을 읽듯이 차분하게 정토삼부경을 읽고 사유하면서 부처님이 뜻하신 바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다시 적어보겠다.
오늘은 그런 48대원의 제외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마음자리에 들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적는다. 위에 적었듯이 아미타부처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80억 겁의 생사 죄가 소멸된다고 하는데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죄업이 소멸된다는 말씀은 지장경에도 나온다. 지장보살이 중생에게 이익되는 일을 말하게 허락하시라고 청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그대가 지금 자비심을 일으켜, 죄업으로 인해 고통에 빠진 육도중생을 제도하고자 불가사의한 일을 말하려 하는구나. 지금이 바로 그때이니라. 마땅히 속히 말하여라.' 이런 부처님의 말씀 후에 지장보살이 칭불명호의 공덕을 쭉 나열하는데 그 내용 중 일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현재나 미래세의 인간, 천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어떤 중생이든지 단 한 분의 부처님 명호만 생각하여도 공덕이 한량없사온데, 하물며 많은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고 부르면 어떠하겠나이까? 이 중생들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큰 이익을 얻고, 결코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옵니다. 또한 어떤 이가 목숨을 마칠 때 가족들 중 한 명만이라도 이 사람을 위해 높은 소리로 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주어도, 오무간지옥에 떨어질 큰 죄를 제외하고는 목숨을 마치는 사람의 나머지 업보가 모두 소멸되옵니다. 그리고 오무간의 대죄는 지극히 무거워서 억 겁을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목숨을 마치는 이를 위해 부처님의 명호를 명호를 불러주면, 그 무거운 죄업도 점차 소멸되나이다. 하물며 그 중생이 스스로 부르고 생각하면 어떠하겠나이까? 한량없는 죄가 소멸되고 한량없는 복을 얻게 되옵니다.'
부처님은 보살이 하려는 일이 '자비심으로 죄업으로 빠진 육도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또 보살은 오무간의 대죄(오역죄와 다르지 않다)도 죽음을 맞이한 이를 위해 불명호를 불러주면 점차 소멸된다고 하면서 스스로가 부르면 한량없는 죄가 소멸되고 복을 얻는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직 불안한가? 아미타불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고 싶은가? 설령 백보 물러나 오역죄를 짓거나 정법을 비방한 이는 왕생이 불가하다고 하자.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엄청나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예를 들어 두가지 죄업에 걸려 이번 생에 서방극락정토에 못간다고 치자. 그런데 꼭 가고 싶다면 이번 생에 굳건한 원을 세우고 부처님 명호를 불러 좋은 복을 받아 태어나서 극락정토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아미타불을 불러도 왕생을 못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밝게 살아가려는 이들의 심성을 흐리지 말았으면 한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름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니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이 보배를 마다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이 보배 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또 주장의 두번째 근거에 대해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말세 말법시를 언급하면서 무량수경이 부처님 멸도 후 2100년까지 유효한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모든 경과 도가 사라지고 무량수경을 자비로 남긴 100년이 지나면 그야말로 모든 경과 도가 사라진 암흑의 시대가 된다는 말 아닌가. (솔직히 그 100년이 이미 지났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는데, 명확하게 알고 말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진실로 궁금하다. 법화경을 제외한 모든 가르침을 다 부정할 정도라면 주장의 근거가 명확해야 하지 않을까?) 어찌되었든 법화경에서 대통지승불을 찬탄하는 범천들의 게송처럼 '부처님 법을 듣지 못해 착한 일도 못하고 즐거움을 잃고 악도에 떨어지는' 그런 시대가 되는 것인데, 지금이 그런 시대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물론 시대가 악함을 나도 실감하나, 경전과 도가 사라져 법을 듣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 눈에는 여러가지 부처님 가르침이 여전히 경전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으며 그 법을 들어 바르게 살아가려는 불자들이 있다. 또 그 주장대로 말법 말세시라 모든 법이 쇠멸했다고 치면 말 그대로 모든 법이 쇠멸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만 공덕있다고 하고 다른 것은 다 지나간 불보살이고 수행이라는 주장 자체가 모순이 된다. 법화경 수행자로서 말하건대 법화경을 믿는다면 멸도하신 부처님이 멸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믿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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