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교묘하게 가리는 것이 두렵다.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13. 19:27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알아차리기 쉽다. 듣자 마자 어떤 부분이 이상한 것인지 금방 알아지기에 바르지 않은 그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바른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다른 것이 섞이거나 살짝 어긋난 이야기를 섞으면 어떨까? 들으면 대략 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부정하기 어려운데 뭔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찜찜함이 있다고 알아진다. 무엇이 찜찜함을 만들어내는가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다.


교묘하게 가리는 논리는 우리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간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논리의 흐름을 타 익숙해지면 다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해는 점점 더 큰 확신이 되어 아무리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도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당신에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면 해설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경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리 번역의 문제점을 거론한다 해도 한 사람의 편향된 이해로 펼쳐진 법의 논리보다 미흡한 번역서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번역이 발목을 잡는다고 믿는다면 여러가지 번역서를 읽어보면 된다. 또 능력이 된다면 원어로 된 경전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생의 문제인데 그 정도의 정성은 들여도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교묘하게 가리는 논리를 벗어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어디에서 나올까. 부처님에 대한 믿음, 바르게 법을 이해하겠다는 원, 부처님 가르침인 경전을 받아지니고 읽고 사유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렇게 하다 보면 교묘하게 가리는 논리를 만날 때 뭔지 모를 찜찜함을 느끼게 된다. 이해가 깊다면 읽는 즉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여러 글을 읽으면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처님 가르침이 참으로 무엇인가이다. 법에 대한 이해가 근기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과정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과정이라 하더라도 법에 대한 바른 이해, 어긋난 이해가 있으니 어긋남을 알았다면 떠나야 하고 떠나도록 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법에 대한 예의이며, 법을 공부해가는 이에 대한 예의이다. 우리 삶은 귀하다. 교묘하게 가리는 논리에 휘둘려 삶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