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터넷에서 법화경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남묘호랑게쿄에 대한 글이 있다. 남의 이야기, 또는 자신이 신봉하는 종단의 이야기로 글을 적는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남묘교(줄여서 말하겠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누가 이렇게 말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법화경에서 직접 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법화경 카페에 한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다.
'법화경 수행은 오종법사행으로 아는데, 남묘나 어떤 단체에서는 지금이 말법시대이므로 법화경을 절대적으로 믿고 제목만 불러야 공덕이 나온다, 수지외에 수행은 무용지물이다, 사경은 상법시대의 수행이므로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대방등대집경 월장경인데 말법시대에 접어들면 백법은몰 투쟁견고의 시대라 하여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과 수행방법들이 문상으로만 존재하고 효력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법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건데 효력이 없다면 왜 제목부르는가? 그리고 남묘에서는 석가부처님은 말법시대에는 효력이 없는 부처이고 자신들의 조사 스님인 니치렌 스님이 이시대를 구원할 부처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이 투쟁견고시대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효력이 다했다고 하는데 백법은몰 투쟁견고의 시대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법화경만을 수행해야하는 시대인가'
법화경을 3년밖에 안읽어서그런가, 내가 보기에는 이상하다. 법화경 어디에도 저런 말은 없다. 아니라면 나에게 알려주기를 바란다.
말법시대가 되면 세상이 참 패악해져서 어렵겠지만 내가 법화경을 수지하고 가르치겠노라고 서원하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법화경에 가득하다. 생각해보라. 누군가가 가르치면 나는 배운다.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배우면 곰곰히 사유하며 익힐 것이다. 이게 배움의 모습이다.
제목 봉창만이 공덕이 있다는 말은 정말 이상하다. 법화경 다라니 품에 법문의 이름을 지니는 자를 수호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을 보면 제목 봉창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법화경 여러 곳에서 법화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깨닫고 알리고 쓰고 쓰게 하는 공덕이 크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수 있다. 말법시대 중생은 근기가 너무 하열하여 읽고 깨닫는 것이 불가하기에 제목봉창이 최선이라고 한다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고 능히 할 수 있는데 더 나은 방법들이 공덕없다고 하면 억지논리일 뿐이다. 근기가 높은 이들은 그들의 근기에 맞게 수행해나가면 된다.
또 삿된 말법시대의 근기 낮은 중생을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염불을 비중있게 가르치셨다. 정토삼부경에 나오듯 모든 경전이 다 사라져도 염불에 대한 것은 만년인가 더 가게 한다고 하셨으니, 이런 논리로 본다면 말법 시대에 더 적합한 것은 염불이다. 맞지 않나? 누가 말법시대에는 법화경만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염불할 사람은 염불하고 법화경 읽을 사람은 법화경 읽고 읽을 근기가 안되면 제목봉창하면 된다. 부처님은 자비로써 근기따라 여러 가지 법을 펼쳐놓으셨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말하는 방편설이지 않나.
참된 가르침을 위해 수많은 방편으로 법을 설했다는 것이 법화경의 스토리인데 이것만이를 주장하는 남묘교는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나 역시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법화행자로서 법화법문이 최상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것이 최상이니 이것만 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목적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근기따라 차용한다. 맞지 않는가? 그길 마지막에 법화경이 있다. 근기가 된 자가 만날 수 있는 경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법화경에 나와있듯이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나 받아들이는 이들의 근기가 다르다. 자기 근기만큼 법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누구의 근기가 최상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부루나미다라니자 같은 최고의 법사를 만난다면 정말 좋겠지만, 우리의 안목으로 누가 부루나미다라니자인지 어떻게 명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의 입과 생각을 통해 나온 것들은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주축이 되고 토대가 되는 것은 경전이어야 한다. 불완전한 근기로 누군가가 이해한 바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니 경을 직접 읽어 부처님께 직접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경전을 꾸준히 읽다보면 어떤 글을 읽었을 때 괜찮은지 이상한지에 대한 감 정도는 온다. 그 때 합당한 글을 읽어나가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주축은 경전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내 안에 주축이 제대로 서게 되면 이상한 환경에 둘러싸여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다. 역량이 커지면 환경을 바꿔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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