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적을 마지막 글이다. 처음 적으려고 했는데 적다보니 마지막이 되었다.
방생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걱정했고 꿈까지 꿨는데 그 마음이 의미없지는 않았나 보다. 누군가 답글로 글을 적어주었다. 자신은 방생을 많이 하는데 방생을 폄하하는 듯하여 글을 적는다고 했고 무주상보시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면서 글을 적었다. 그 답글에 대해서 동의한다고 글을 적은 이도 있었다. 누가 처음부터 잘하냐고.
사실 그 글들이 크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방생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방생을 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좀 더 들여다보고 불자로서 더 고귀한 방생이 되도록 마음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내 생각을 적은 글이다. 같은 행위라도 같지 않다. 맞지 않은가. 왜 그럴까.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생을 폄하한다고? 아니, 착각하지 마시라. 방생은 무엇이든 고귀하다. 그 고귀한 방생을 효과를 운운하면서 하는 그 마음을 돌아보라는 글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고 배움이 있다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고 머물러야 하는 마음자리가 있고 수행이 되어감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마음자리가 있다. 만약 20년을 기도했는데 여전히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마음이라면 그건 떠나야 될 마음자리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방생이 어렵다고? 어렵다. 물고기를 사서 풀어주는 방생을 말하고 있으니 나도 그 방생을 말하겠다. 다른 이를 위해 돈을 쓴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물고기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쉽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가만히 앉아서 전화 한통으로 해결하건 내가 직접 가는 수고로움을 하건 생명을 살리겠다는 그 마음과 행은 쉽지 않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하는가. 그저 살리겠다는 마음인가. 아니면 그 행으로 내가 덕을 입고 싶기 때문인가. 그저 살리겠다는 마음이라면 배울 마음이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덕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라면 그 덕보고 싶은 마음만큼 정성을 들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내가 받기 위해 베푸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 유익함을 얻고 싶어 움직이는 것인데 어찌 불자가 그런 행에 대해 폄하를 하는 듯 하여 기분이 나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관한 일이기에 모든 방생이 좋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처음부처 잘하지 않는다고 핀잔 주는 사람이 내 글에 있는가. 그리 생각하는 당신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생각일 뿐인 글이지만 고귀한 방생을 하고 있으니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글에 휘둘리는 당신의 마음은 무엇인가. 무주상보시가 어렵다고? 어렵다. 어려우니 우리가 배우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배움과 노력 속에서 한발 한발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 말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언제 닿을 날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부처를 말하고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언젠가는 닿기를 바라고 닿을 것임을 믿기에 오늘 비록 땅을 디디고 서있더라도 이제 곧 만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어렵고도 어려운 불지혜를 말하고 무주상보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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