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피에 대한 내 글을 읽고 어떤 법화경 공부자가 '법화행자가 염불도 아닌 주문에 불과한 다라니 운운한다는 것은 갓쓰고 자전거 타고 가는 꼴이 아닌가, 법화경의 다라니는 법사를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천수경 등에 나오는 다라니는 주문에 불과한 게 아닌가?'라고 질문을 했다. 탈퇴한 카페라 답을 하자면 다시 가입을 해야 하는지라.
어떻게 생각하는가? 먼저 주문, 다라니, 진언, 다 같은 말이다. 표현을 달리할 뿐 그 근본은 다 같다. 다시 말해 다라니는 다라니에 불과한 게 아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상한 질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질문자의 질문을 그대로 이해하는 선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다라니를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아주 소수의 다라니를 읽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다라니를 설한 뜻이 있다. 이 다라니는 무엇을 위함인지에 대한 설명을 불보살님은 하신다.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다라니를 수지독송하는 이를 보호하고 복으로 이끄는 내용이었다. 맞지 않는가? 법화경의 다라니가 법사를 보호한다면 천수경의 다라니는 그 다라니 수지독송하는 이를 보호한다. 그 다라니에 담긴 뜻으로. 그러니 다르지만 사실 다를 바가 없다.
법화경이 최후의 가르침,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의견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맞춰 설하신 모든 법을 별 것 아닌듯이 가볍게 여기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하나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이르는 모든 길을 부처님은 인정하고 계신 것 아닌가. 법화다라니만 다라니인가? 아니다. 다른 다라니도 다라니다. 법화경만 부처님 가르침인가? 아니다. 다른 가르침도 부처님이 설하신 바라면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 결국 법화의 가르침까지 이를 수 있다.
법을 대하는 각자의 이해가 상이함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닿아있는 것만이 정답이고 최고인듯 표현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속으로 하는 생각까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로서 법을 말할 때에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이러하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이해를 적는 내 글도 이상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니 법을 배우는 이는 겸손을 유순함을 늘 마음에 담아야 한다.
질문하신 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답인데 어떻게든 꼭 전할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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