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스님에 대한 내적 갈등,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적은 글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보고 다니나? 부처님, 법을 보고 다니지.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떠나야 할 때가 있고 머물러야 될 때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외부의 환경이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 내가 결정적 요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기청정기라고 하면 각자의 용량이 있다. 10평 공간을 청정하게 할 힘이라면 10평 이내의 어떤 공간에 놓여져도 문제가 없다. 일단 오염도는 동일하다고 치자. 하지만 15평, 50평의 공간을 마주하게 되면 결국 고장나는 것은 나이다. 무엇이 현명할까? 그냥 나는 공기청정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 자리에 머문다면 들어오는 오염물질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결국 망가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라면 내 능력을 벗어남을 알아쳐렸을 때 그 곳을 벗어나 나의 능력, 힘을 키우는 노력을 하고 15평, 50평도 능히 마주할 수 있을 때 돌아올 것이다.
함께 하는 것들은 중요하다. 좋은 사람을 좋은 책을 좋은 환경을 찾아다니는 것은 함께 하는 것들로 영향받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일 수 있다. 향기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지 견고한지가 문제이다. 견고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 것에도 물들어가는 수준이라면 당연히 가까이 하는 것을 가릴 필요가 있다.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능히 향기를 낼 수 있다면 장소를 사람을 환경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 분별이 필요하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무의식은 불성은 부처님은 떠나 있으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제 머물라고 말하기도 한다. 떠나야 할 시점에 사람들의 간섭으로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머물라고 말하고 마음으로 응한 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죽이려는 꿈을 꿨다. 실감나는 꿈이었다. 결국 떠났고 돌아가야 되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릴 때 돌아갔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지나고 보면 불성의 소리를 따를 때 모든 것이 선으로 귀결된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법계가 움직인다 생각했지만(이런게 착각, 교만이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배려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악업짓지 않기를 바라는 법계의 배려.)
내가 사찰을 스님을 두고 고민하는 이유는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 누군가를 탓하기 위함도, 내가 잘났다고 하기 위함도 아니다. 단지 부처님 법을 바르게 배워 나가고 배워 나간 것으로 밝히는 것이 지금 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유익함을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고민하는 문제이다. 어찌보면 남은 이들이 대단한 사람 아니겠는가. 물론 휩쓸리는 이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휩쓸리지 않고 영향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니.
사찰과 스님에 대한 내적 갈등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
'201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르는 것을 잘못 말하여 죄짓지 마라. (0) | 2018.12.15 |
---|---|
기도 많이 해서 궁금한 일이 어떻게 될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친구 (0) | 2018.12.15 |
이 꿈, 무엇을 반영함인가. (0) | 2018.12.14 |
비판은 쉬우나 반성은 어렵다. (0) | 2018.12.13 |
어려운 일체유심조 (0) | 2018.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