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염불을 펼치는 이들은 자력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염불하는 나는 이것이 참 불편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자력을 낮게 보지 않으면 염불 주장이 안되는가 싶다.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의 부처님이 내가 아는 부처님이라면 그런 주장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로서는 자력, 타력이 함께 굴러간다. 온전한 자력도 온전한 타력도 마땅치 않다. 왜냐하면 불가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불성이 있고 내 밖에 불성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만을 쓸까.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를 생각해보라.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하지만 부모의 참된 기쁨은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지, 언제까지나 부모만을 의지하는 것에 있지 않다. 부처는 마치 우리에게 부모와 같아서 의지하는 불자가 부처님 최고의 기쁨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결국 밖의 부처님에게 완전하게 의지하는 것, 다시 말해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고 아름답다 찬탄하는 타력으로 시작해도 결국은 자신의 불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다시 말해 하나의 부처되는 것, 다시 말해 자력에 의하게 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일일까.
우리 안에 불성이 있음을 믿는가. 우리 안에 불성이 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가. 언제나 타력만을 주장하는 사람도 타력에 온전히 던지는 날이 계속 되면 자력에 대한 인식이 홀연히 솟아오를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 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넘어갈 것인가. 자신 안에서 드러나는 부처를 나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열심히 구할 것인가. 분별은 자력수행을 하는 이를 경시하면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다. 자력을 말하고 타력을 말하면서 우열을 마음에 담는 그 순간 우리 마음에 가득한 바로 그것이 불필요한 분별, 버릴 분별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타가 함께 돌아간다. 타력으로 시작해도 자력이 드러나고 자력으로 시작해도 타력안에 머무른다. 시작에서도 끝에서도 결국 온전한 타력과 온전한 자력이 없으니, 불성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배우면 배울수록 같지 않다 하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텐데 말이다. 염불을 신묘한 현상쯤으로 치부하지도 말 일이며, 염불을 자력과 동떨어진 타력으로 치부하지도 말 일이다. 아미타불을 타력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자력을 품고 있으니 자타가 함께 굴러간다. 이런 나를 부처님이 '너는 타력수행 아니니 받아들이지 않는다'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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