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불교대학의 간부인 분을 만났다. 자신이 주도하고 가르치는 불교 공부모임이 두 개인데 하나 더 만들어진다고 했다.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시각으로 누군가의 불교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불편했다. 각자의 인연이고 나의 이런 생각도 불완전할테지만 그래도 마음이 그러했다.
나누었던 내용을 적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그가 팔정도를 내세우면서 정견과 사견을 말한 것을 두고 현재 내 근기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며칠전 일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 적을만큼 알거나 사유하지 못했기에 다음 기회에 적으리라 마음먹었는데,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리 말하나 저리 말하나 내 근기에서는 이렇게 이해가 되는 일이니 말이다.
내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에게 정견은 부처님 재세시의 가르침에 국한된다.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가 정견인 것이고 대승불교도 그저 창작일 뿐이라 정견이라기 보다는 사견에 가깝다. 모든 종교를 떠나 진리를 말하는 나에게 기독교는 불교와는 그 가르침 근본이 다르니 정견의 'ㅈ'에도 다가갈 수 없는 가르침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리 이해되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솔직히 그런건지 아닌지 모르겠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걸리는 마음에서 점차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근본을 말하기 위해 이리 말하기도 하고 저리 말하기도 하는 그 상황들에 대해 크게 매이지 않는다. 진리를 담았다면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진리를 진리대로 이해하는 자가 그 종교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있을 때, 손가락은 달에 이르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 손가락에 매여 이 손가락이 아니면 안된다는 분별심, 집착에 빠지면 달에 닿을 날이 너무 멀어질 것 같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정과 사를 논할 때 그것이 살아있는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나왔는가 아닌가가 기준이 되는 것은 너무 얕은 시각이다. 나온 것이 같은 것을 말하고 같은 것으로 이르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지점보다) 더 나아간 것 같아요.'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높을테니 별 볼일도 없는 나의 이 말이 얼마나 아니꼬울까 싶기도 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는 내가 만난 이 자유로움의 맛을 모를 것이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그 방편이 무엇이든 방편을 통해 제대로 배운다면 같은 것에 닿게 될 것이다.
창작이면 어떠한가.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부처님이 중생에게 나아가라 한 그 지점으로 들어서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성이 이끈 창작, 부처님의 작품 아니겠는가. 모든 불성의 움직임이 부처인데 이 부처면 어떻고 저 부처면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이 불필요한 시시비비, 분별에 빠져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그러니 진득허니 공부하면 좋겠다. 나 잘났다는 그 상을 버리고 도대체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마음열고 배웠으면 좋겠다. 우리의 부지런함이 중생의 편안이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쓰다보니 '너 잘났다' 말들어도 할 말 없는 글이 되어버렸는데 내 마음이 그러하다. 나도 미흡하지만 불자의 마음은 금강처럼 견고하면서 바른 것을 받아들임에 유연해야 한다. 견고할 때, 유연할 때를 착각하면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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