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에 대한 답을 적기 위한 글이 아니다.
어제 일이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혈압을 재고 나면 그 동안 혈압체크한 것을 정리해달라고 하셨다. 오늘 서울 병원으로 진료를 보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었기에 피곤한 상태에서 마음편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잠이 들뻔한 순간 시간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가니 자신의 말에 묶여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늘 해오던 대로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짜증이 올라왔다. 10분 정도 안정을 취하고 재면 되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안정을 취하다가 재려고 하는가. 이미 1시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았고 어머니는 여전히 혈압을 잴 기미가 없었다. 화가 나는 마음은 어머니에게 곱지 않은 음색의 말을 쏟아붓게 만들었다.
결국 내 말에 혈압도 재지 못하고 머리가 어지럽다면서 자리에 누워버리셨다. 혈압측정결과 정리를 이미 3번은 한 것 같은데 정리하다 보니 이상했다. 8일만 재면 되는 것을 늘 2주씩 재고 있었고 한번 잴 때 두 번을 측정해야 하는데 한 번만 측정하고 있었다. 똑같은 일에도 배우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반복하고 한편으로는 하던 것마저 놓치는 어머니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불러 그 사실을 말하는 내 음색은 거칠었고 어머니는 그대로만 적어달라고 하면서 자리에 누워버렸다. 잠시 후 손발이 저리니 주물러달라, 따뜻한 물을 가져다달라는 주문에 아버지가 분주했다. 발을 같이 주물러주다가 나와서 잠자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참 이 세상이 싫다, 어서 빨리 극락으로 갔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것도, 욕심내는 것도 다 싫다. 그것이 나든 다른 사람이든 참 지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랬다. 지금 가면 마음 편하겠나.
아침일찍 터미널에 부모님을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하루는 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사는가. 적어도 좋아지기 위해 사는 것일텐데 왜 불필요하게 스스로를 어지럽히고 있을까. 어머니에게 이해안되는 부분이 아직 많다. 그런데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면 되는 일인데 왜 좀 더 자비롭고 지혜롭게 대하지 못했을까. 어제를 지나고 남은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남은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어리석지 않은가. 물론 이러면서 배우고 좋아지지만 다쳐야 위험한 것을 아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반복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가여운 것이다.
요 며칠 블로그에 내가 매인 마음의 글들을 적어왔다. 나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각자의 생각,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비난의 색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수준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의 수준이 어떠한지, 다른 이의 수준이 어떠한지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법화경에도 그리 나온다. 우리가 여래 아닌데 누가 어떤 근기인지 어찌 정확히 안단 말인가. 나나 당신이 높고 낮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조사를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불자가 이 세상의 그 어떤 대상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하물며 부처님 법으로 지극하게 수행한 조사를, 선지식을? 설령 내가 가볍게 여긴다고 가벼워지는가? 불법을 바르게 받아지닌 이는 작은 생채기도 낼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나의 글을 읽을 생각이라면 그리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면 내가 왜 그런 글을 적었는지를 이해하는 노력을 한번쯤은 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얻을 바가 있지 않겠는가.
성철스님, 청화스님, 또 누군가 언급했던 많은 조사님을 존경한다. 잘몰라도 그럴 것이고 조금 알아도 그럴 것이고 많이 알아도 그럴 것이다. 존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그런 마음이 그 분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것은 받아들일 것이고 어떤 것은 내 근기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어떤 것은 내가 이해한 바와 다르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내 근기도 변화한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그러니 당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너무 그것에 매일 필요도 나를 달리 볼 필요도 없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경전을 벗어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도 내 착각일 수 있지만. 당신들이 신봉하는 것이 참으로 맞다면 언젠가는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러하다고 내가 소리 높여 외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것을 나누기에도 아쉬운 날이다. 이리 말한다고 내가 늘 잘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리 마음먹기에 미흡한 점들이 점점 보완되어 간다고 본다. 오늘 잠시 예전에 즐겨 찾았던 어떤 이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망라하여 수행을 하는 분인데 이제는 극락정토에 나기를 발원하며 염불을 한다고 한다. 글에 적은 염불의 경계 내용이 내가 경험하는 바와 살짝 닮은 듯 하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돌아 돌아 결국 불자는 부처님 법으로 돌아오니 말이다. 또 나보다 훨씬 아는 바도 많고 경험도 깊은 이가 이제 염불의 경계라고 올린 글이 전혀 새롭지 않으니 말이다. 컴퓨터의 화면이 이상하다거나 꿈 속에 이런 저런 것들이 알아진다거나 현실을 살아가면서 법계의 메세지가 알아지는 것 같은 생각, 느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누구에게나 그러하지만 단지 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니, 중요한 것은 외부의 현상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내 내면에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요 며칠 나의 글로 심기가 불편한 이가 있다면 그 마음을 풀고 편안하고 밝은 마음으로 부처님 법을 배워나갔으면 한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나가는 같은 불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법화경을 읽는가. 읽어서 무엇이 좋은가. 나로서는 법화경을 읽고 나서야 법이나 사람들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 마음, 태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좋았다. 조금 읽었는데 이러하니 그 끝은 어떠할지 가늠할 수 없다. 궁금하지 않은가. 왜 저 사람은 저리 잘난체를 하는지(원래는 당당한가로 표현하려 했는데 댓글을 적는 이의 분위기를 읽으면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아 표현을 바꿨다. 아님 말고다.). 왜 늘 편안함을 말하고 밝음을 말하는가. 별로 배운 바도 수행한 바도 없는 것 같고 없다 하는데 아는 체를 하는지 말이다.
예전에 내가 염불에 대해 궁금해할 때 어느 스님이 염불을 해보고 나서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 이후 나는 염불을 했고 해답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갈 이유를 잃게 되었다. 내가 적는 글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왜 그런지 알고 싶다면 부처님이 알려주시려고 했던 법화경의 가르침을 배우겠노라는 뜻을 세우고 읽고 사유해보라. 내가 닿은 가르침에 닿는다면 나처럼 당신도 미소짓을 것이며 시비를 가리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경전을 읽을 때 당신은 어떤 뜻을 품고 읽어나가는가. 나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뜻대로 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바를 바르게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고 싶습니다. 그 이해와 깨달음으로 저, 저와 마주하는 이들의 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런 발원을 마음에 담아도 충분하지 않은데 내가 뭐 잘났다고 나를 내세울까. 나의 표현에서 나 잘났어, 나 옳아를 느낀다면 내 표현력이 미흡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읽을 자신이 없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좋자고 읽지, 마음에 번뇌를 담으려고 읽는 것이 아닐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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