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기도글에서 기도를 하면서 마음에 담는 내 뜻이, 더 밝고 좋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돌아보았다고 적었다. 그리고나서 법화경을 읽는데 문득 기도와 중도에 대한 생각이 일었다. 기도와 중도, 자연스러운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들지만 어찌되었든 기도에 대해 중도의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작은 생각을 앞선 글에 추가하여 적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개인의 의견이니 가볍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중도는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최적의 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최선의 상태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도자의 중도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투자(?)하는 만큼의 성과를 바라는 것이 기도자의 중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백원의 정성과 힘을 들인다면 백원 만큼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도다. 만원의 결과를 원하여 그런 뜻을 세웠다면 만원에 걸맞는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만원의 정성을 들이면서 백원의 결과로 한정짓는 마음도 중도에서 벗어난 치우친 마음이고 백원의 정성을 들이면서 만원의 결과를 바라는 마음도 중도에서 벗어난 치우친 마음이다. 모두 탐진치에 가까운 마음이다.
투입과 산출에 대한 기대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한 것은 투입과 산출은 일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불보살의 가피는 대단하니 작은 노력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투입과 산출이 일치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대단한 가피가 드리워지도록 법계를 움직이는 정성이 그만큼이라는 것이니, 여전히 투입과 산출은 일치한다. 오늘은 내가 세운 원에 합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기도자의 중도를 이뤄가는 날 되었으면 한다.
글을 쓰고 보니 두 가지의 이야기다. 하나는 뜻을 밝고 바르게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산출에 대한 확실한 그림을 그리라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뜻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도리를 정성스럽게 해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투입에 대해 정성을 다하여 충족될 때까지 노력하라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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