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꿈 속에서 화가 나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현실과 다를 바가 없는 동일한 감정과 생각으로 대상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깨어나서 내면에 감추어진 화를 알아차리고 다시 모습을 추스릴 때라 생각했다. 그리고 누워있는데 아미타불이 문득 생각났다. 휴대폰으로 검색하니 화면 하단으로 홍익학당의 한 강의가 떴다. 인터넷을 켜고 강의를 찾아 들어보았다.
3년 전이니 어떻게 이해와 생각이 변화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강의를 잠시 본 내 감상을 적어보려 한다.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것의 장단점을, 홍대표님의 이해를 조금 알 것도 같다. 나는 불교 가르침에 귀의한 불자로 경전, 그것도 나에게 인연된 경전만을 읽는다. 물론 어떤 경전을 가져오더라도 마음에 크게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든다. 왜냐하면 그런 자리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의에서 언급한 억지 회통과는 다르다.
불교의 가르침은 팔만사천의 법을 말한다. 그렇게 다양한 법이 존재함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이하다는 것에 그 이유를 둔다. 그렇게 펼쳐진 다양한 법은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듯이 보이지만 자신에게 맞는 법을 공부하여 점차 근기가 높아지면 점차 그것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지장경을 읽었고 법화경을 읽고 있으며 아미타불 염불을 한다. 소승의 경전을 가져오면 걸릴까? 그렇지 않다.
결국 하나의 법이다. 그 하나의 법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양한 법을 말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의 법을 보아도 그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의 법에 다가가기 전에 이미 시비 분별하는 그 마음에 발목잡히게 된다. 보았지만 보았다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보지 못했는데 다 알았다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다. 지장경을 읽었고, 법화경을 읽고 있으며, 선지식들의 법문을 조금씩 읽었던 나는 각각의 경전 가르침이 (겉으로 보기에) 동서남북으로 튀어도 산란하지 않다. 그것이 돌아가는 자리가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안다.
다양한 법으로 펼쳐졌다는 것만이 난제일까. 아니다. 하나의 법을 가지고도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는 사실이 또한 난제이다. 하나의 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그들의 근기에 따른 이해이며 그것이 법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의 이해를 기준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강의에서 언급했듯이 정토삼부경의 치우친 이해가 정토삼부경의 가르침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각자 노력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기본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믿는가. 진리가 있다면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교의 색을 입든 진리를 말한다면 서로 통한다. 그것이 회통이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 회통이 장애물에 막히게 되는 것이니, 진리를 보고 말하려는 이들은 서로 다른 근기로 달리 표현되고 이해된 사람들의 말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육바라밀도, 염불도, 독경도 모두가 하나의 흐름안에 있으며 어디에서 시작하든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든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의 근기로 만들어낸 불완전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해석된 법을 모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자라면 경전, 기독교도라면 성경을 바탕으로 부처님이, 하느님이 전하려고 했던 그 진리를 그 뜻대로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홍익학당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이 펼쳐지는 세계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계의 일부와 다를 바가 없다. 공한 성품에서 일어난 허상의 세계를 말한다. 물론 허상이라 해도 그 자체가 실상이니 분별하는 마음이 어리석다 생각한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직 충분히, 제대로 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 읽는다고 진리가 담기고 꿰뚫어질 그럴 근기 어디 있을까. 법은 쉽지만 쉽지 않으며, 근기가 달라지면 다른 이해가 생긴다. 그러니 너무 한번에 단정짓지 말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부처님이 공덕으로 이룬 세계이다. 그것이 색계라고 하면 큰 일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이들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공부하여 부처님이 된다. 최종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또 예토를 싫어해야 정토에 태어나고 오온을 싫어해야 열반에 든다? 그것이 조건인 듯이 말하는 그 이해는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든다. 간단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과정이기도 하고 부분적이기도 하다. 사람의 근기따라 내세우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법화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오온을 싫어해야 열반에 든다는 것이 과정,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세상의 욕락에 빠져 고통을 거듭하기에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하여 그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생사를 떠난 열반이 담기지만 부처님은 그제야 최상의 것, 부처되는 것을 이야기하신다. 세상의 재미에 빠져 있는 이에게 부처를 말한들 누구의 마음에 닿을까. 법화경을 읽은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제대로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가 그 책을 이해했다고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리는 일이 된다. 경계할 일이다. 특히 집단을 이끄는 이, 밝은 세상을 말하는 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이 정법이다. 자신이 마주한 법에 지극하면 결국 법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결국 우리도 부처가 된다는 하나의 법에 이르게 된다. 나는 2015년말부터 법화경을 주로 읽고 있다. 그리고 마음을 제한하는 것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은 보았나 한다. 이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왜냐하면 이해가 변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글에 적는 주된 표현이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이다.
불교공부하면서 홍익학당의 강의가 재미있기도 했고 참고할 점들이 많아서 좋았었다. 그런데 오늘 본 강의에서 자명한 느낌있으니 안으로 더 충분히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불자인 나 역시 많은 불자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치우친 이해이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아니다. 만약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꿰뚫는다면 사실 크게 걸릴 것이 없다. 그 공한 바탕에서 불성의 자비와 지혜가 무엇을 보이려 하는가를 안다면 팔만 사천의 법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이 머리 산란하게 만드는 경전의 가르침들이 다 편안할 뿐이며 하나로 이어질 뿐이며 진실로 회통할 뿐이다. 안할 이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래전에 꾼 꿈이 생각난다. 법을 이어받아 전하고자 하는 이라면 손대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건물로 치자면 골격이다. 바닥이 불안해지고 출입구가 달라지면 그 건물은 더 이상 지은 자의 건물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고 싶은가. 그 중 불교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불교 조금 공부한 내가 이리 적고 있으니 참 이상한데 조금 공부한 내가 보기에 그의 이해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해로 불교에 대한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로서 바라건대 우리의 이해가 더욱 밝아지기 바란다. 염불을 해도 부처되는 길로 이르고, 독경을 해도 부처되는 길로 이른다. 그 부처되는 모든 길은 육바라밀로 장엄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염불에 심취한다고 너무 속단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부르면 온다. 오면 만난다. 만나면 물든다. 나는 이 단순한 이치를 믿는다. 만약 염불을 해도 여전히 사람이 그대로라면 아직 멀은 일이지만, 생각하면 변하게 되니 지극하고 오랜 염불이라면 바뀌지 않을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염불하는 이가 육바라밀과 멀 것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다. 멀어도 언젠가는 그 사람이 육바라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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