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난행과 이행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1. 7. 00:47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되었다.


염불을 주장하는 이들은 난행과 이행이라고 법을 나누어 말한다. 무엇이 난행이고 무엇이 이행인가. 어디까지가 난행이고 어디까지가 이행인가. 그것을 말하는 이들은 정확히 알고 하는 소리인가. 솔직히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법은 펼쳐져 있고 각자의 근기와 인연따라 법을 만나는 것인데, 자신이 아는 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남에게도 맞지 않다고 전제하는 것은 매우 일방적이며 그리 지혜로운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모든 길은 각자의 특색을 지니며 결국 하나에서 만난다. 그 특색을 고려해 길을 정한 사람에게 자신의 길만 좋은 듯 주장하면 그건 늘 최선의 일이 될 수 없다.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자신의 최상이 다른 이의 최상이 될 수 있는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결국 가치를 두고 의미를 부여하는 비중이,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면 법을 나누고자 하는 의미가 퇴색되고 오염된다. 모든 법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자신이 지닌 법을 전해 원하는 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바르게 알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펼쳐야 하는 전법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그 모든 길을 만든 이들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특색이 다름을 알기에 각자의 입맛에 맞게 길을 펼쳐놓았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 자신의 경험치가 유일한 정답인듯 말한다면 정말 그런 것이 되는 것인가?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정토법문을 배워 환희심에 넘친다면 법화경보다 자신에게 염불이 맞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법화경보다 염불이 더 나은 법인듯, 경전을 버리고 염불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인 듯 말하면 아주 이상한 일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을 흐리면 안된다. 말을 잘못해서 사람들에게 혼선을 유발하면 안된다.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는 경전이고 받아지님을 기뻐하는 경전이다. 아미타부처님도 부처님인데 기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염불하는 이가 잘못 아는 것이다. 법화경은 최상의 가르침, 최후의 가르침이다. 법화경을 읽었다면 알 것 아닌가. 아라한이 되면 설한다고 표현하신 구절이 있으니 모두가 읽어도 제대로 읽기 어려운 경전이다. 극락왕생하여 부처가 되었다면 배웠을 법문이다. 그런 것이다. 차라리 법화경은 최상의 법문이나 그것을 바르게 받아지니는 것이 어려워 쉬운 염불문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이해하겠다. 법을 흐리면 안된다.


난행과 이행, 그것이 완벽하게 분리되는가? 염불도 독경도 나에게는 다르지 않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운 이끄심에 힘입어 바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불성의 자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외부의 부처에서 시작하지만 내 안의 불성에 이르게 되고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알게 되면 결국은 모두 불성의 문제일 뿐이다. 무엇이 이행이고 무엇이 난행인가. 관무량수경의 구품왕생을 보라. 무엇이 이행이고 무엇이 난행인가. 단지 극락왕생만을 생각하면 이행이다. 하지만 경전을 읽어보라. 그렇게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다.


나는 염불행자다. 그런데 어떤 이의 염불을 권하는 그 마음은 기쁨으로 와닿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부처님 자비의 정수같은 염불을 권하는데 말이다. 모든 법을 인정해야 한다. 잘몰라도 상관없다. 불법은 평등하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고통으로 얼룩진 이 사바세계를 하염없이 떠돌 가여운 이들에게 염불과 극락정토, 아미타부처님의 원을 설하라.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의 법을 고수한다면 그 법으로 세상을 밝히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