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노래 연습을 하기로 했다. 우리 파트가 늘 지적을 많이 받기 때문이기도 하고 음을 잡아 소리 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신입단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시간이 일요일에만 가능하다는 사람이 있어서 일요일 오전에 연습하기로 결정했다. 점심시간에 동생 부부가 오기로 해서 신경 쓸 점이 많았지만 연습 참여를 위해 아침 일찍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취소하고 다음에 하자는 이야기가 카톡에 올려져 있었다. 나와 한 명을 제외하고 다 일이 있다고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습 잘하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혼자 연습해도 충분하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을 위해서 참석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기에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렇게 가볍게 개인사를 내세워 연습을 취소하면 내가 다음 연습에 참석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스스로도 하찮게 여기는(말로는 중요하다 해도 행이 그러하지 않다면 실제로는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노래에 대해 내가 귀히 여겨줘야 할 이유가 있겠냐는 말이다. 시간이 있어도 팀을 위해 별도로 시간 낼 마음이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이 상황은 내 기분과 팀에 대한 판단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확장시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닿게 한다. 요즘 수행하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노래를 잘하고 싶지만 개인사를 더 먼저 챙기는 단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요즘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내 편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피곤하면 휴식을 해야 하고, 다른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나면 수행하고 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렬해지면 기도한다. 분명 개인의 소망이 있고 더 넓은 발원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 이루어질까. 이런 식이라면 수천, 수만, 수억 년이 지나도 멀 것이다.
물론 자비로운 부처님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놓지 않겠지만, 법계를 가득 채운 힘의 존재들은 냉철하다. 스스로도 귀히 여기고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일에 그들이 마음을 내어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아주 특수한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 믿을만한 이유가 있는가.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 수행을 한다면 탐진치에 물든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를 스스로 일으켜야 한다. 정한 바가 있다면 하늘이 두쪽 나도 꼭 지키겠노라는 그런 헌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속에서 감동이 일어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줄 이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또 언젠가는 스스로 원하는 물결을 뜻대로 일으킬 수있을 것이다.
목적을 두고 일정기간 기도할 때에는 다르겠지만 일상의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너무 나태해지는 경향이 있다. 일상이라 해도 기도이고 수행이지 않은가. 그 행위를 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수행일지라도 자기 편의가 아닌 기도 중심, 수행 중심의 기틀을 갖추고 스스로 귀히 여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마음을 쓰고 정성을 다한다면 온갖 존재들의 감응을 일으켜 순조로운 조화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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