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법화경, 약사경) 증상만의 모습에 대해 / 공왕불 댓글에 대한 생각

향광장엄주주모니 2022. 5. 16. 11:54

증상만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요즘 약사경을 읽고 있는데 약사여래의 공덕을 설명해주는 부분에서 증상만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불자로서 참구 할 점이 많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먼저 약사경의 해당 부분입니다.

 

또 문수사리여, 어떤 중생은 여래를 받들고 배우고 따르지만 계율을 범하는 경우가 있고, 계율을 범하지는 않지만 규칙을 범하는 경우가 있으며, 계율과 규칙을 범하지는 않지만 정견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느니라.

또 정견을 깨뜨리지는 않지만 많이 듣는 다문(多聞)을 버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는 경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다문은 할지라도 증상만(增上慢)에 빠져서 자기는 옳다 하고 남은 그르다고 할 뿐 아니라, 정법을 혐오하고 비방하면서 마의 무리와 짝을 하게 되니라.

이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사견을 행함은 물론, 무량 중생들까지 지옥에 떨어지게 만들거나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를  하염없이 흘러 다니게 만드느니라.

 

다문을 해야 경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처님 법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설하는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경전에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다문의 기본은 경전을 많이 읽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문을 해도 증상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증상만에 빠진 사람은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법을 혐오하고 비방하면서 마와 무리가 됩니다. 정법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경전에 담겨 있습니다.

 

증상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출발한 듯 보이나 결국 그 가르침을 혐오하고 비방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옳고 남들은 틀렸다는 인식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상만에 빠진 사람들의 가장 두려운 점은 스스로의 삶만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무량 중생들까지 악도에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당연히 다문을 통해서 경의 깊은 뜻을 이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그 경전을 가르침을 떠나는 증상만에 빠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은 법화경입니다.

(방편품) 저들은 자신의 선근을 자만하여 증상만에 빠진 탓에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고 또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고 여기거늘

(상불경품)

스스로 본 것만 빼고 아무것도 믿지 않던 다른 비구 비구니들에게 저 보살이 다가가 말하되...

오로지 육식(六識)의 증험(證驗)만 인지하였던 저 많이 이들도...

 

증상만은 자신의 선근을 자만하여 그 병에 빠집니다. 그래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고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고 여깁니다. 자신이나 상황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법에 대한 큰 착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 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조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전부라고 믿는다는 증상만의 특징입니다. 경험은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경험자에게 틀림없는 진실일 테지요. 아마도 유일한 진실처럼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모든 부처님들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원만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독경의 중요성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글을 적습니다. 다른 글로 적겠지만 꾸준한 독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 독경의 과정을 자신의 머리에 의지하여 하지 말고 법을 설하신 부처님께 청하고 맡기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의 수준에 맞게 중간중간 알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언제라도 증상만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님의 법을 대해야 하는지, 증상만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 것인지를 알게 되니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독경을 통해서입니다.

 

 

공왕불 댓글에 대한 생각

오늘 글을 적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공왕불 기도에 대해 적은 글에 달린 댓글 덕분입니다.

 

누군가 나무묘법연화경의 산스크리트어가 공왕불 이름이라고 댓글로 알려옵니다. 번역의 과정에서 착오가 있다고 말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다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조금 궁금했습니다. 번역 전 원본을 보니 그렇다거나 하는 진실 말입니다.\

 

또 이 분은 경험을 내세우며 공왕불 기도를 주장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을 때 좋은 결과가 없었는데 공왕불 기도를 하니 아주 효과가 있었다고요. 그 이유를 저에게 말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대댓글을 달았습니다. 신묘장구대다리를 해서 효과를 본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그 이유를 말할 수 있겠냐고요. 

 

공왕불 기도를 주장하시는 분 중 이런 류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법이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법은 늘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경험이 다르다면 어느 쪽의 문제일까요? 법일까요? 사람일까요? 자신의 경험으로 정법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믿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부인하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험이 우주의 유일한 경험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방편 설법을 생각하면 각자에게 더 적절한 법이 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말세 말법시를 내세우며 특정한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불보살, 수행법)은 다 지나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으로 수행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줄을 세워 자르듯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합니다.

 

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법화경의 설법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의 수행으로 내가 드디어 법화 법문을 받아들일 근기가 되면 법문이 여지없이 설해질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지나간 수행법, 지나간 불보살 덕으로 법화 법문에 들어온 이들이 있는데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크게 보면 경인지 불인지 법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전에 보면 법이 곧 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체득이 된 것이 아니지만 어렴풋이 그 맛은 알 것 같습니다. 부처를 부름이 곧 법을 만남입니다. 분명한 것은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분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치성해진 분별심은 오히려 본질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증상만의 글을 잠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역시 법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정법에서 시작하나 정법을 부인하는 것이 증상만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법화경에서 시작해서 법화경을 많이 읽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어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저는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지장경과 지장보살에게 귀의하여 불성의 자비에 닿게 되었고 법화경으로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지장경에서 닦은 공덕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이들은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에게 가까워지게 하는 모든 것이 정법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법을 찬탄합니다.

승가를 찬탄합니다.

모든 것이 불법을 따라 원만성취되어지이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일체불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