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문득 법화경 제목 봉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읽는 법화경의 번역자가 집필한 책 중에 제목 봉창을 강조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이 분은 왜 이런 말을 하지? 법화경에도 제목 봉창을 크게 언급한 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1년도 더 지나고 나서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질만한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인지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머리말을 읽다가 말았지만, 덕분에 관련된 부분을 사유하게 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정토삼부경과 염불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정토삼부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아미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극락정토의 장엄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극락왕생의 모습과 인연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자연히 적법한 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막연했던 수행이 명확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경전을 읽으며 수행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돼주지만, 부처님을 만나는 것,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불성의 발현은 염불할 때 많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서 암울했던 내 안에서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분노가 가득찼던 마음이 사그라듭니다. '아, 불성의 나툼이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머리로는 알지만 잘 해결되지 않던 부분이 염불을 하면서 해결됩니다.
분명 정토삼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는 과정 속에서도 부처님을 만나지만, 본격적인 움직임은 염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불을 통해서 불성과 합일되고 불성이 발현됩니다. 이건 아주 실질적입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앉아야 할 자리로 나아가는 길에서 독경과 염불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명확하게 답하기 어렵지만, 경전을 통해서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안내를 받는 것이며, 이 안내를 바탕으로 한 염불 등의 수행과정을 거치면서 목적지로 나아가는 힘을 얻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칼로 자른 듯한 분별이 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분명 경전을 통해서도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법화경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최종적으로 이르게 하고 싶은 곳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난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불지혜에 이르게 되는 가장 실질적이고 강력한 방법일까요? 솔직히 잘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제목 봉창을 중시하는 이들이 '법화경에서, 정토삼부경과 염불의 관계와 비슷한 무언가를 찾은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 말입니다. 항간에는 부처님의 이름, 경전 이름에 모든 공덕이 함축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런 추측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시 말하지만 경전을 읽고 힘들게 뭔가를 하기보다 그 핵심으로 그냥 들어가겠다, 뭐 이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소견에는 염불이, 제목 봉창이 최고이니 다 필요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경을 받아지니라는 당부가 경전마다 중하게 언급되어왔기 때문입니다.
필요하지 않았다면 언급되지 않았을 당부가 왜 경전마다 그렇게 올려진 것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바르게 알고 나아가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야 원만해진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전의 말씀을 알고 난 후에야 최선의 염불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최선의 제목 봉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법화경을 그대로 받아지닙니다. 물론 제 수준, 딱 그 정도 수준의 이해일 뿐이라서, 아직은 경의 이곳저곳에서 반복하여 설명되는 수행방법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더불어 다라니품에 보면 제목을 받아지니는 것도 의미 있음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그 행위도 복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목 봉창이 염불처럼 바로 불지혜로 들어가는 최상의 방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 아직 그 부분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경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법을 전하는 것은 모든 희망의 싹이 되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입니다. 또 길을 나아갈 때 이정표가 되어 줍니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사유가 있은 후에는 법화경을 독송하고 잠시라도 나무묘법연화경을 읊조립니다. 좋은 일이니까요. 경을 읽고 마음을 모아 차분히 제목을 읊조립니다. 감각에 끄달리면 안되지만 머리 부분에 기감이 느껴집니다. 이 기감은 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독경을 하거나 염불을 할 때도 느껴집니다. 특별하다고 할 것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기운이 움직입니다.
오늘은 묘법연화경 제목 봉창에 대해서 적어봤습니다. 염불도 좋고 제목 봉창도 참 좋습니다만, 이것에 더해 경전을 많이 읽어서 바른 길로 나아가는 이정표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만약 염불하거나 제목 봉창을 아주 열심히 해서 무언가를 이루었는데 그의 마음과 언행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대치된다면 그의 성취는 좋은 것일까요?
나의 마음, 말, 행동이 나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닮아있지 않다면 내 수행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또 다시 강조하건대 경전을 읽고 새기는 것은 너무 바른 길에서 멀어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나무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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